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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도서

시집 종이 - 신달자

 

 

 

바람의 시

 

바람이 집을 지었다

무 속에 집을 지었다

 

한겨울 저렇게 깊고 그윽한 하얀 속살 속으로

나도 들었으면

 

바람에게도

온 몸을 숙이고

무를 파고 들면서 까지

반드시 은거하고 싶은

하얀 속살의 집이 필요했는가

한 장 종이의 은근한 비밀이 필요했는가?

 

 

 

사약

 

사약을 받는다

다시 사약을 받는다

천만 번째 사약을 마신다.

그는

단 한번도 죽은 적이 없다

서슬 푸르게

종이의 정신은

사람들의 변절 앞에서도 번뜩인다.

 

 

 

꽃 비친다 하였으나

 

나 어린 처녀 때

가랭이에 물컹 살점 떨어지는 기미 있었는데

"꽃 비치는 기라, 말하거래이"

어머니 일러 두었건만

아무리 생각해도 꽃은 아닌 것 같아

문 걸어 잠그고 나 그걸 종이에 묻혀 보았는데

살점도 아니고 붉은 피고 아니고

꽃은 더욱 아니었는데

첫 경도를 종이에 바친

종이에게 첫여자를 바친

종이와 관계한

죽어도 끊을 수 없는

내가 가야 할

숙명적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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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종이에 담긴 세상 만물의 생동감!

한국문학의 여성 시를 대표하는 시인 신달자가 ‘종이’를 주제로 한 전작 시집 『종이』. 시인의 미발표 신작 시 76편을 모은 이 시집은, 종이가 걸어온 길부터 삶과 글이 하나였던 보르헤스의 삶까지 시 한 편 한 편에 담긴 종이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이 시집에서 모든 사물은 종이로 수렴된다. 하얗고 텅 비어 있고 그래서 무얼 느끼기 어려운, 밋밋하다고 어설피 생각해 버리기 쉬운 종이에 살아 움직이는 감각적인 이미지를 부여하였다. 자연의 모든 것에서 종이를 노래하는 그녀의 시편에는 파괴되어 가는 자연 환경에 대한 안타까움과 사라져 가는 감수성에 대한 슬픔이 구석구석 배어 있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