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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서서히 완성되는 밤

[서서히 완성되는 밤]

 

 

 

밤이 낮보다 분명히 길어져 가고 있었다. 몇 번을 자다 깨도 아직 어두운 밖을 보면서 나는 몇 시쯤일까 생각해 보았다. 창밖에 서있는 은행나무의 그림자가 희미하게라도 비치지 않는 걸 보니 한 두 시가 겨우 지난 것 같았다. 일찍 잠에 든 것도 아닌데 근례 잠을 깊이 자지 못하고 새벽에 깨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었지만 그러고 나면 다시 잠이 들지 못 할 것 같아 눈을 감고 가만히 숨을 쉬었다. 하지만 의식은 더욱 또렷해왔고 오늘도 기어이 해가 뜨는 걸 볼 것 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 밖에 나온 물고기가 숨을 쉬듯이 나는 한두 번 큰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속에서 더 또렷이 살아나는 기억과 함께 누군가가 내 가슴에 올라타 앉아 있는 것 같이 가슴이 먹먹해져 왔다. 그리고 이어지지 않고 흩어져 쏟아지는 기억의 파편을 나도 모르게 주워 모으고 있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는데.’

기억을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어둠속에서 유영하고 있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기억들. 어쩌면 실제보다 괴물이 되었을 수도 있는 기억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 그것에게 먹힐 마음의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기어이 눈물을 도르르 베게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후회한다. 후회한다.’ 라고 몇 천 번을 이야기 했는지 몰라도 아직도 나는 그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그 사람과 나는 3년 전에 헤어졌다. 3년 전 그날 내 기분이 그랬기 때문에 생각 없이 내 뱉은 헤어지자는 말이었는데 그 말은 숨을 쉬고 살아나더니 나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말이 나를 움직였고 나는 그를 정말로 떠나버렸다. 그렇게 간단히 떠날 만큼 우리가 가벼운 사이는 아니었다. 우리는 3년을 만났다. 3년이란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지만 3년을 만나는 동안 그의 아버지가 암 투병을 하셨고 그가 병원에 있는 내내 나는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더 신뢰하고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힘들어 할 때도 나는 그의 머리를 만져주며 슬픔을 달래주었다. 내가 그였고 그가 바로 나였다. 우리는 만나는 동안 한번도, 단 한번도 이렇게 갑작스런 헤어짐을 생각해 보지 않았다.

 

나는 어둠속에서 눈물을 닦아 내었다. 헤어진 후로 그의 소식을 듣지 못했지만 이런 날이면 어렴풋이 그도 나를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그도 문득 문득 잠에서 깨어 나를 생각할지도. 비록 헤어졌지만 우리의 영혼은 아직 헤어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고요한 밤이 되면 나는 그의 맥박을 느끼고 그의 숨소리를 느끼고 그의 생각을 읽는다. 어느 날밤 잠에서 문득 깨어 그가 누군가와 결혼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예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우리는 이정도로 깊게 연결이 되어있었다. 하지만 다 끝난 일이라는 것을 다시 인정해야 한다. 지금 그는 내 옆에 없기 때문이다.

 

너를 정말 사랑했었다.”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그는 마지막을 그렇게 정리했다. 3년 전 우리는 헤어졌고 3년을 그가 괴로워하는 동안 나는 아무렇지도 않는 듯이 지내왔었다. 그가 나만 믿고 의지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부담스러워 숨어버리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잠깐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우리는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도대체 왜 그러냐?’ 는 문자메시지에 제대로 대답도 해주지 못하고 나는 숨어버렸다. 잠깐 숨을 쉬고 싶었다고 말했으면 됐을 것을. 우리가 너무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답답했다고 이야기 했더라면 그가 이해해 줬을 것을. 그땐 나도 내 마음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어둠속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지막 만났다 헤어지는 날, 그는 나를 집 앞에 내려주며 사랑했다고 이야기 했다. 내가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침묵의 시간 동안 그는 마음을 정리했고 나를 내가 아닌 그의 과거로 지우려는 듯 했다. 나도 그를 붙잡지 않았고 그도 더 이상 나를 붙잡지 않았다. 하지만 그 후 3년을 그는 힘들어했고 나는 오히려 지금 힘이 든다. 내가 그를 잊고 사는 동안 그는 술에 절어 살았다. 그는 내게 힘들다며 전화 한 적도 없었으며 친구를 통해 나에 대해서 물은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이별이라는 것을 감기처럼 가볍게 앓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많이 힘들어 했었다는 것, 그래서 친구의 병원에 자주 입원했었다는 것과, 2년을 그러다 지금에서야 사람같이 살고 있다고 친구를 통해서 듣게 된 것이다.

 

혈관을 떠돌던 바늘이 마침내 심장을 찌르듯이 내 심장이 다시 아팠다. 그가 아파했을 고통이 그때서야 내게 밀려왔다. 그를 힘들게 했다는 죄책감에 내가 무너져 버렸다. 아직도 눈만 감으면 보이는 그의 얼굴이 꿈속이라도 나타나면 나는 눈물을 흘린다. ‘미안했어. 네가 그렇게 아파하고 있었다는 걸 몰랐어.’ 그가 아파했다고 생각하면 온몸을 짜내 눈물을 다 빼버릴 만큼 울어버린다. 그래야만 내가 괜찮았다. 그렇게 나도 3년보다 더 아파야 할 것 같았다. 그와의 이별은 감기가 아닌 결핵, 아니 그 이상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온 우주가 까맣지만 우주의 시선이 나를 향해 있는 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는 슬픔이었지만 어둠이 안아 주었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그도 나 없는 3년을 어둠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밤에 자주 깨어 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가 3년을 혼자 슬퍼 한 것처럼 말이다.

 

서서히 어둠에 익숙해진다. 밖에는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낮게 깔린 귀뚜라미 소리. 그 속에 내가 눈물로 베개를 적시며 이 쓸쓸한 밤을 완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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