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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이것은 내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 이다

[이것은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다]

 

 

가끔 내셔널지오그래피 채널에서 육식동물들이 새끼를 키우는 것을 볼때면 아버지 생각이 난다. 특히 족제비나, 그런 류의 동물들이 자신보다 힘이 센 동물을 피해 작은 쥐나 오리를 물어다 새끼를 먹이는 것을 보면 어떤 측은함 마저 드는 것이다.

어릴 적 나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멋있는 경찰이셨다. 늦은 저녁, 회색 경찰복을 입고 독수리가 번쩍거리는 모자를 쓰고 들어오시는 아버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멋진 분이셨다. 나뿐만 아니라 언니도 동생들도 어디에서 놀고 있든지 아버지의 구두소리를 들으면 만사를 제쳐두고는 뛰쳐나가서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며 두 팔에 매달려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웃으며 우리와 잠깐이라도 놀아주셨다.

그래서 우리들은 동네아이들을 만나면 우리 아버지는 경찰이다.’하고 자랑부터 했으며 아이들과는 항상 경찰놀이를 하자고 제안을 했었다. 우리는 늘 경찰이었고 아버지가 집에 두신 못 쓰는 수갑을 들고 나와선 아이들을 체포하곤 했는데 그럴 때면 도둑이었던 친구는 꼼짝없이 아버지가 퇴근해 열쇠로 풀어 줄때까지 잡혀있어야 했다. 집에서 우리들은 타자기를 앞에 두고 취조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이름과 주소를 묻고는 무슨 죄를 지었는지 타자를 치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 당시 수사반장이라는 드라마가 인기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경찰이 하는 일을 잘 알았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경찰이라는 것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학교에서 아버지의 직업 칸에 경찰이라고 써내는 일이 일 년에 열두 번은 되었으면 싶었다.

경찰이 아니었더라도 아버지는 늘 자상하셨다. 우리에게 화내는 법이 없었고 밥을 먹을 때면 자식들의 밥 위에 생선을 발라 주시고 당신은 늘 생선의 머리만 빠셨다. 중학생이 된 언니를 위해서 독서실에 간식을 직접 넣어주시는가 하면 언니가 집에 갈 때쯤에 그날 당직에게 부탁해서 독서실주변을 순찰하게 하셨다. 이렇게 우리는 아버지의 보호아래 어린 시절을 무사히 행복하게 보내었다.

 

하지만 내가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고 머리가 좀 커졌을 때였다. 중학생이 되면서 멀리 학교를 다녔고 어릴 땐 보지 못했던 일들을 하나 둘씩 보게 된 것이다. 버스를 타고 지나가는 서울 시청에는 언제나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가 걸려 있어고 , 거기에는 독재타도라느니 계엄 반대라는 문구가 적혀있었다. 독재가 뭔지, 계엄이 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섬뜩하고 무서운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 당시 아버지는 밤을 새고 들어오시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 가끔 함께 밥을 먹을 때면 아버지는 친구들과 어울려서 늦게 다니지 말고 시청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문득 시청에서 본 말이 궁금해서 아버지에게 물어보았지만 아버지는 놀라시며 그런 말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때 언니는 고개를 푹 숙이고는 대답 없이 밥만 먹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는 알았냐며 언니를 다그쳤고 언니는 밥을 먹다말고 방으로 들어가 버리곤 했다. 그럴때면 고등학생이 된 언니가 사춘기라며 엄마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이야기 하곤 하였다.

학교에 가도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1학년인 우리들이야 천둥벌거숭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지만 머리가 굵어진 몇몇 3학년 선배들은 학교에서 주의 학생으로 감시를 한다는데 시청에서 대학생들과 시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그런 시위현장에 계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선배들의 하는 짓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게 뭐라고 아직 16살 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이 어른들과 싸우냐 말이다.

 

하루는 잠결에 아버지가 늦게 집에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우리가 자는 걸 확인하시고는 친구 분과 거실에서 술을 한잔 하셨다. 친구 분은 같은 형사인 것 같았다. 오늘 서울대학교에서 시위가 있었는데 누구를 잡았다고 했다. 몇을 잡고 어떻게 족쳤다는 이야기를 살벌하게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박 뭐시기를 고문 했다고 했다. 아버지는 평소와는 달리 무척 거칠었고 누구를 때리고 잡는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하시는 것이었다. 우리들과 이야기 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박뭐시기라는 사람이 자정에 죽었다고 했다. 나는 그말에 놀라 일어나 앉으려고 하는데 언니가 깨어 있었는지 내 손을 꽉 잡는 것이었다. 언니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언니는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였다. 나와 언니는 아버지의 친구 분이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잠이 드는 소리를 들은 후에야 조용히 일어나 앉았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었다. 아버지가 사람을 죽였다는 것과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 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나는 언니에게서 독재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5.18항쟁과 군사정부에 대한 이야기도... 많은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아직 싸우고 있다는 것도 들었다. 그러자 나는 지금 아버지가 정확히 무슨 일을 하고 계시는지 알수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의 대화 내용도 이해할 수 있었다. 언제나 우리에게 영웅과도 같았던 아버지는 독재자의 하수인이었던 것이다.

나는 한동안 충격으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한 달 뒤에 신문에 박종철이라는 서울 대학생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분명 그날 밤 아버지가 이야기한 박 뭐시기라는 사람일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누가 진짜 잘못된 사람인지 아직도 헛갈렸고 게다가 13년을 존경하고 좋아했던 아버지를 한순간에 다르게 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설마..하는 마음까지..

박종철이라는 사람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소문이 돌면서 시위는 한층 더 격렬해 졌다. 나도 언니도 한동안 학교를 나가지 못했다. 집에서 티비를 보며 하릴없이 있는 나와 달리 언니는 초조해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 아버지는 비상근무로 몇 일째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 나는 티비를 보는 척하며 언니를 지켜보았다. 꼭 무슨 일을 저지를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밖에서 일어나는 소란의 긴장감이 집안에도 감돌았다. 그날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고 있는데 대문이 조용히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언니가 밖을 나갔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좆아 가보지는 못하고 언니가 곧 돌아오기를 바랄 뿐이었다. 한 시간이 지났을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버지가 돌아 오셨다. 나는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와 동생들은 거실에 나와 아버지께 인사를 했고 아버지는 언니가 보이지 않는 것을 그냥 넘어 가셨다. 아버지가 언니가 집에 없는 것을 아실까 조마조마 했다. 아버지는 저녁을 다 드신 후 다시 나가시려고 일어나다가 언니의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러고는 나를 부르시고는 언니가 어디에 갔는지 물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언니가 저녁 먹고 밖에 나갔다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아버지는 갑자기 우리 방에 들어와서는 언니의 책상을 뒤지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전문가답게 언니의 책상 서랍에서 구겨진 종이를 찾아내셨다. 그것은 거리에 뿌려져 있는 시위 찌라시였다. 오늘 저녁 8시 연세대학교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다는 것이었다. 아버지의 손이 떨리더니 곧 그 종이를 찢어 버리시고는 사복 차림으로 급히 밖으로 뛰어나가셨다. 그리고 그날 밤엔 언니도 아버지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언니와 아버지의 소식은 다음날 점심이 지나서 알게 되었다. 엄마는 급히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뛰어가셨고 거기서 입원해 있는 언니와 영안실에 있던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자초지정은 친구 형사 분이 이야기 해주셨다. 저녁 8시 언니는 연세대에 시위에 참가하러 갔고 아버지는 그날 연세대에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먼저 언니를 찾으려고 사복차림으로 학교에 잠입한 것이었다. 언니를 찾은 아버지는 오지 않으려는 언니와 실랑이를 하던 중에 경찰이라는 것이 밝혀지고 학생들에게 잡혀있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경찰의 시위진압이 시작되었고 여기 저기 터진 체류탄 때문에 학생들이 정신을 잃은 사이에 아버지는 언니를 데리고 빠져나오셨다. 하지만 그렇게 나오는 중 아버지는 진압군들이 쏜 체류탄에 머리를 맞으신 것이다.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돌아가셨고 언니는 가스에 의해 의식을 잃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지고 언니는 퇴원을 하였다.

 

언니는 그 후 학교를 가지 않고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서나 언니의 그날 일에 대해서 아무도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날의 시위로 아버지 말고도 안타까운 생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했다. 시민들과 학생들의 민주화에 대한 갈망은 더 거세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조용히 지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민주화의 소용돌이 속에 살았지만, 나의 아버지는 그것을 막는 독재자의 앞잡이였고, 하지만 그는 우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한 가장이었고, 우리는 그런 아버지를 부끄럽지만 사랑했던 것이다. 언니는 검정고시를 친후 야간 대학을 다녔다. 야학을 하면서 그때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에 들은 이야기 이지만 언니는 아버지가 진 빚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아버지가 진 빚을 갚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하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했다. 언니는 바르게 자랐다. 비록 족제비가 물어다 주는 먹이를 먹고 자랐지만 족제비의 지극한 사랑이 언니를 사람이 되게 한 것이라 생각한다. 나 또한 커가면서 사회에 빚이 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언니와 나를 족제비의 자식이 아닌 사람으로 키워준 아버지에게 감사하며 그날을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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