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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쓸쓸한 밤거리를 걸으며

[쓸쓸한 밤거리를 걸으며]

 

 

 

바람이 차츰 차가워지고 있습니다. 여름내 태풍같이 자랐던 우리는 이제 떠날 때가 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을 햇살은 따가워 졌지만 추워진 날씨 덕에 나무는 이제 물을 먹지 않습니다. 쪼르륵 하는 물소리가 끊기고 우리는 신록을 벗고 빛나는 노란색 수트를 입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찌르는 가을 해를 맞으며 더 가볍고 바스락하게 말라가고 있습니다. 나 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도 이제는 나무를 떠나 자유로이 떠다닐 수 있는 앞으로의 여행을 기대하며 바람 따라 너울거립니다. 그러다 성급히 먼저 땅으로 떨어진 낙엽도 있었습니다.

안녕, 나 먼저 떠난다.”

친구는 바람을 타고 먼저 가을여행을 떠납니다. 몸도 마음도 가벼워 갓 걷기 시작한 아기 마냥 뒤뚱이며 멀어져 갑니다.

 

거리를 거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점점 두꺼워 집니다. 매일 아침이면 골목 앞 은행나무를 지나가는 긴 생머리의 아가씨는 이제 베이지 색 코트에 하늘하늘한 밤색 스카프를 걸치고 출근을 합니다. 그러곤 골목을 지나다 잠깐 우리를 올려다보고 웃으며 지나갑니다. 나는 마치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어 더욱 예쁜 노란색을 만들어 보였습니다. 그리고 떠날 때가 온다면 저 아가씨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 생각을 하자 내 얼굴이 점점 더 황금빛이 되어 햇살을 튕겨냅니다.

 

드디어 나는 떠날 준비를 합니다. 오늘 밤 바람이 더 거세질 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하나 둘 인사를 하며 하늘로 올랐다 저만큼 떨어집니다. 어떤 친구들은 무리를 지어 큰 대로로 나가 회오리를 타고 미친 듯 달려갑니다. 멀리 떠나기 싫은 친구들은 나무 밑에 그림자처럼 내려앉기도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아직 손을 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 나는 그녀의 퇴근시간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오늘 따라 퇴근이 늦은 그녀 때문에 저는 안간힘을 쓰고 버티고 있습니다.

또각 또각 또각

멀리서 그녀의 하이힐 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강아지 마냥 기뻐 바르르 떨며 그녀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멀리서 걸어오는 그녀는 왠지 조금 쓸쓸해 보입니다. 불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날리고 고개는 숙이고 두 손을 주머니에 찌르고 걷는 모습이 위태로워 보입니다. 나는 그녀를 위로 하고 싶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다시 골목 앞을 지나며 은행나무를 올려다봅니다. 마치 먼 나라에 두고 온 가족을 생각하듯 그녀는 고개를 갸웃하며 바라봅니다.

나는 이때 달빛에 몸을 빛내며 그녀 앞으로 떨어졌습니다. 나는 그녀만의 특별한 낙엽이 되고 싶다고 간절히 빌었습니다.

....” 그녀는 그녀의 구두코에 떨어진 나를 바라봅니다. 그러고는 손으로 나를 집어 듭니다.

그녀는 나를 들어 달빛에 비춰보고 빙글빙글 돌려도 봅니다. 그러고는 그대로 손에 들고 집으로 향합니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그렇게 그녀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녀 방의 창문에 붙여졌습니다. 그래서 항상 그녀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녀는 예뻤고 여느 여름 나무만큼 싱싱했습니다. 그녀의 방에는 항상 커피 향기로 가득했으며, 깨끗하고 알록달록한 책들이 벽면 한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그녀는 작은 오피스텔에서 혼자 살았는데 가끔 친구들이 놀러와 자고 가곤 했습니다. 그녀는 밝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예전처럼 쏟아지는 해는 볼 수 없었지만 행복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가끔은 내가 그녀와 함께 집에 온 날처럼 우울해 지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 날처럼 바람이 불거나 비라도 올라 치면 그녀는 넋을 잃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했고, 노트북을 켜고 멈칫멈칫 망설이며 일기를 쓰기도 했습니다. 어떤 이들이 가을에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슬퍼하는 것처럼 그녀도 가을을 탄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멀리서 그녀의 일기를 읽었었습니다. 그녀의 어깨 넘어 힘들다는 말이 보였습니다. 나는 왜 그녀가 괴로워하는지 무척 궁금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왜 괴로운 것일까 생각하니 가슴이 쓰려 왔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하고 있었습니다. 상대는 언젠가 소개로 만난 남자였는데 그녀는 첫눈에 반하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헤어진 이후 남자에게서 더 이상 연락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분명 밥을 먹고 차를 마실 때 서로 너무 잘 맞는다고 얼굴을 붉히며 그가 말했는데 말입니다. 어쩔 수없이 그녀는 그를 포기하였습니다. 그런데 그해 여름쯤에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느닷없이 그를 다시 만났다고 합니다. 그는 그녀가 다니는 회사에 택배를 배달하러 왔었고 그가 떨리는 손으로 건네주는 택배를 받으며 한참을 둘이 멍하니 서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분명 그가 L전자에 다닌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말입니다. 그녀는 도망치듯 나가는 그를 붙들고 자초지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는 L전자를 다니는 친구를 대신해서 그녀를 만났으며 자신은 소설가 지망생이며 부업으로 택배를 배달한다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그를 보내고 그녀는 화가 났습니다. 발에 체이는 대로 낙엽을 걷어차기도 했지만 밤거리를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기도 모르게 그의 얼굴이 달이 밝게 떠오르듯 마음속에 떠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때 노란 은행잎이 구두코에 떨어졌다고 합니다. 나는 왜 그녀가 나를 그렇게 좋아해 주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그녀에게 와 준 것처럼 그 남자도 용기를 내어 자신에게 다가와 주기를 그녀는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녀는 택배가 배달 될 것이라는 그 남자의 문자를 저장해 놓고 있었습니다. 택배가 잘못 배달되었다는 핑계라도 대어서 다시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도 망설입니다. 그와 진심으로 사랑에 빠진다면 앞으로의 생활이 힘들어 질것이 너무나 빤히 보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그렇게 일기를 쓰고, 한숨을 쉬고 먼 길 떠나는 사람 마냥 이 가을을 쓸쓸하게 보냈던 것입니다.

 

어느 날 밤 그녀에게 문자가 하나 날아왔습니다. 잘 지내냐는 그 남자의 문자였습니다.

나는 대번에 그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확신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나를 손에 들고 걸었던 그녀의 마음이라면 분명히 그 남자를 만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다음날 아침, 잠을 제대로 못 잤는지 그녀는 일찍 일어났고 상기된 얼굴로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냅니다. 나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저녁 창밖으로 한 남자와 함께 걸어오는 그녀를 보았습니다. 때로는 위태로워 보였고, 가끔은 외로워 보였던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행복한 얼굴을 보입니다. 둘은 한참을 가로등아래 서서 이야기했고, 둘은 뭐가 재밌는지 웃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아쉬운 듯 그와 인사를 하고 집으로 들어 왔습니다. 그녀가 집으로 들어오고도 그 남자는 골목 어귀에서 그녀의 방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방에 불이 꺼지자 그는 그제야 돌아서 가는 듯 해 보였습니다. 그러다 그는 가던 길을 멈추고 바닥에 뒹구는 노란 낙엽을 주웠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그랬듯이 아무것도 아닌 그것을 달빛에 비춰보고는 그대로 손에 쥐고는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나는 내 여행의 끝이 행복해서 좋았습니다. 그녀가 더 이상 낙엽을 생각하지 않게 될 쯤 나도 색이 바랬습니다. 흙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온 것입니다. 그녀와 함께 한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앞으로 행복해 질것이라는 확신도 듭니다. 창밖으로 옷 벋은 은행나무가 보입니다. 나는 내년 봄 그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이제 흙이 됩니다. 여린 새싹으로 다시 세상에 나올 때 닮은 모습을 한 그와 그녀가 나를 함께 바라보기를 바랍니다. 행복하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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