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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당신은 물속에 있다.

 

 

눈을 떠보니 내가 물속에 있었다. 분명 아침이면 내 방 침대에서 알람소리에 깨거나 엄마의 밥하는 소리에 부스럭거리며 깨야 하는데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여기는 물속이다. 이것은 꿈도 아니고 SF영화도 아닌 내겐 정말 실제처럼 느껴진다. 나는 한 줄기 해초처럼 바닥에 붙어 물결이 움직이는 대로 너울거리고 있다.

물위는 화창한 가을 날씨인 것 같다. 눈부신 가을 햇살이 내게도 비친다.

나는 어떻게 된 것일까. 나는 죽은 것일까 산 것일까. 죽었다면 이렇게 의식이 분명할 리가 없고 살았다면 의지대로 몸이 안 움직일 리가 없다.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내가 물고기나 수초가 아닌 아직 사람이라면 나는 여기를 나가야만 한다.

하지만 무엇에 꽁꽁 묶였는지 나는 제자리에서 뱅글뱅글 돌뿐이었다.

일렁이는 물결 때문에 나의 뇌가 두부처럼 흐느적거리는 것 같았지만 찬찬히 생각을 가다듬었다. 내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나는 분명히 퇴근길에 중요한 볼일이 있었다. 여러 증빙서류들과 녹음파일, 그것들을 들고 검찰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나는 내가 다니고 있던 회사가 부도가 날것이라는 사실을 한 달 전에 우연히 알게 되었다. 대주주 몇 명과 회장님과의 정기적인 미팅이 있는 날에 나는 비서로써 몇 가지 서류를 복사하다 부도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 부도는 의도적인 부도였다. 회장님과 대주주 몇 명은 한 달 뒤 회사의 주식을 팔아 이익을 챙기고 회사는 부도 처리해서 헐값에 대기업에 팔자는 내용이었다. 비서로써 마땅히 눈과 귀를 막았어야 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럴 수 없었던 것이 한창 주식바람이 불 때 소위 작전주에 투자했다가 결혼자금을 모두 날려버린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친구의 권유로 묻지마 투자를 한 건 잘못이었지만 서민들의 피 같은 돈을 빨아먹고 튄 놈들은 몇 년 복역한 뒤 보석으로 나오곤 끝이었다. 내 돈은? 물론 한 푼도 건지지 못했다. 어째든 투자는 투자였으니까. 이 회사는 그런 작전 때문에 만들어진 유령회사는 아니었지만 근래 회사의 사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이 올랐던 게 이상하긴 했었다. 그러나 이런 불경기에 연일 상한가를 치는 주식에 개미투자자들이 불나방같이 달려들 수밖에 없는 것...

 

대주주들이 주식을 팔기로 한 날짜가 한 달 뒤였다. 나만의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회사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나는 여기저기 구인광고를 뒤적였다. 그냥 회사를 조용히 그만두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모른 체 그만 두기엔 내 양심이 심하게 걸리적거렸다.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으로 돌려받았을 때의 기분을 기억한다. 그 당시 주위에 전 재산을 날려 자살했다는 누구이야기도 들었고 폐인인 되어서 술에 빠져 산다는 누구이야기도 들었다. 나는 젊다는 이유로 주위의 면죄부를 받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지만 그들은 끝내 갱생되지 못하였다.

회장은 아무 일 없는 듯 출근하고 퇴근 했지만 나는 그날 이후로 내 자리가 가시방석과 같았다. 회장이라는 작자가 어쩜 저리도 뻔뻔스러울까 생각이 들 때면 모닝커피에 약이라도 타서 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는 회사주식을 보면 대나무 숲에라도 찾아가 그 주식 사지마세요 라고 소리치고 싶어졌다. 그래봤자 나는 제3자가 아닌가... 많은 희생자가 생기겠지만 나는 여기 있는 동안은 비서로써의 내 의무도 다해야 하는 거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힘들어져 왔다. 빨리 회사를 그만두고만 싶어졌다. 내가 안고 있기엔 너무나 벅찬 비밀을 빨리 벋어 던지고 싶어졌다. 같은 부서에 있는 언니에게 넌지시 이런 이야기를 해보았지만 돌아오는 이야기는 같았다.

"조용히 있다가 회사 옮겨. 나도 빨리 다른데 알아봐야겠다. 일 터지기 전까지 입 다물고 있어. 말 나갔다간 너 이제 비서일 못해" 나는 답답함을 느꼈다. 내가 숨 쉴 공기가 희박해져오는 느낌.

 

드디어 그 일이 있기로 한 바로 전날이었다. 나는 무거운 머리를 가누며 회사에 출근했다. 두 눈마저 무거운 느낌이 들어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내 양심이 나를 너무나 괴롭혔다.

그래서 양심 때문인지 나는 내 서랍에 그날의 문서 복사본과 회의 녹음파일을 숨겨두었다. 파기 지시를 받았지만 내가 따로 보관해두고 있었다. 그 날은 회장도 일찍 퇴근하고 뭔가 회사의 모든 것이 느슨해져 있는 것 같은 분위기기 감돌았다. 나는 그것들을 들고 조금 일찍 퇴근을 했다.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방황하고 있다가 나는 무작정 검찰청으로 향했다. 빨리 가지 않으면 늦는데 내 몸이 더 무거워지고 발걸음이 더뎌지는 것을 느꼈다. 내 양심과 내 몸이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후 5시 나는 검찰청 정문 앞에 있지만 더는 들어가지 못하고 숨이 가빠오며 눈앞이 가물가물해져 오면서 정신을 잃을 것 만 같았다. 내 양심이 숨을 쉬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는 듯했다. 내 생존본능은 그런 나의 발걸음을 돌려보려 하는 것 같았다. 양심에 대한 강한 거부감 그것이 나의 생존본능이었다.

그러고 나는 정말 정신을 잃었나 보다. 지금 이렇게 눈을 뜨니 나는 물속에 있었다. 여기가 어딘지 도저히 모르겠다. 왜 여기에 있는지도 도저히 모르겠다. 하지만 검찰청 앞에서 그렇게 아팠던 머리도 떠지지 않던 무거운 눈도 이제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제 기능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그냥 물속의 식물처럼 시류에 떠다닐 뿐이었다. 나는 언뜻 주위에 나와 같이 식물처럼 물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람이 더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모두 같은 박자로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공포..나는 또 다른 공포를 느꼈다. 이건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삶이었다. 나는 왜 이런 삶속에 갇혀 있는 거지? 이런 삶 가운데 왜 버려진 거지 ? 나는 문득 내 손에 든 서류봉투를 보았다. 내가 검찰청에 가져다주려던 그 봉투가 아직 손에 들려 있었다. 나는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으나 전혀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마치 물속에 어떤 마취약이라도 있는 듯 나도 모두와 같은 박자로 흔들거릴 뿐이었다. 나는 무언가에 꼭 묶여있는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내 발은 무언가에 묶여있었다. 움직이려 조금이라도 움직일 때 그것은 내 발을 더 꼭 옥죄고 있었다. 나는 자세히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손이었다. 지금 내가 왼손에 끼고 있는 금반지와 꼭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는 왼손이 내 발을 꼭 붙들고 있었다. 그 손은 이 일이 끝나기 전에는 나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마음속으로 나에게 다짐했다. 나는 꼭 이 일을 해야 해. 앞으로 먹고 살길이 없어진다 해도 어쩔 수 없잖아. 이런 건 그렇게 대단한 일도 아니야. 내가 이런다고 죽는 것도 아니잖아. 제발 나를 이제 놓아줘..

 

나는 저 높이에서 보이는 가을햇살을 향해 힘차게 발을 박찼다. 어느 틈에 내 발목을 잡았던 내 손이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숨을 쉬기 위해, 진짜로 내가 마셔야하는 공기를 마시기 위해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순간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는 어느덧 맑은 정신이 되어 검찰청 정문을 들어섰다. 아직 오늘이 다가기전이었다. 지금의 나의 행동으로 앞으로 어떻게 일이 진행 될 지는 나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의 내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나는 죽어가는 내 양심을 살렸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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