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중간만 하자

 

 

중간만 하자, 중간만

 

전기연

 

나는 다른 사람과는 다른 악몽을 꾼다. 잊을 만 하면 한번씩 꾸는 이 악몽엔 귀신이라곤 등장하지도 않지만 수년간 반복된 덕에 이것은 나를 예민하게 만들었다. 꿈속의 배경은 고등학교 교실이거나 대학 강의실이다. 수업이 시작되면 나는 책을 꺼내려고 가방을 뒤지는데 항상 교과서가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어제 시간표로 책을 챙겨오기도 하고, 어떤 때엔 아예 시간표가 뭔지도 모를 때가 있다. 아니면 강의실을 잘못 알고 찾아갔거나, 숙제를 집에 두고 올 때도 가끔 있다. 그럴 때면 꿈이지만 식은땀이 나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나는 어찌할 줄 모른다. 이런 날이면 하루가 불안해져 언제부턴가 이 꿈은 내게 악몽으로 분류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부터 이런 꿈을 꾸기 시작한 것 같다. 군대를 제대한 남자들이 가끔 다시 입대하는 꿈을 꾼다는 것처럼 공부가 지긋지긋해서겠거니 생각하기도 했고, 또 하루를 실수하지 말라는 계시로 여기고 하루를 조용히 살곤 했었다. 물론 나의 학창 시절의 모습이 그랬던 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볼 수 있다. 수업시간에 책을 안 가져 가본적은 없었고, 엄했던 아버지 덕분에 숙제며 공부며 모든걸 미리미리 해놓지 않으면 안되었다. 또 하면 잘해 보여야 했다. 그리고 나 스스로도 그런 삶을 만족하며 열심히 살았었다. 그래서 더욱 이런 꿈에 대해서 깊게는 생각하지 않고 그냥 잊어버리기 일쑤였는데, 나이가 들면서 어렴풋이 심리적인 문제가 있겠거니 생각은 했었다. 그러나 감출 수 없는 자루 속 송곳처럼 혹시나 했던 문제가 결혼과 동시에 자루를 뚫고 실체를 드러내었다.

 

나의 문제를 깨우쳐준 사람은 피해자인 남편이었다. 사사건건 잔소리를 못해 안달이 난 나를 보며 남편은 자긴 확실이 저질 완벽주의자야라고 말하곤 했기 때문이다.

저질 완벽주의자가 뭐야?”

지는 똑바로 못하면서 남은 완벽해야 되는 그런 사람

듣고 보니 결혼 후 내 모습이 그랬었다. 남편이 해놓은 청소, 설거지 다시 하기, 주말에 조용히 못 쉬고 뭐라도 해야 하기, 물건이 제자리 없으면 불안해 하기 등등. 뭔가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내가 불안해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게 아니었다. 남편이 보기에 사실 그러는 넌 무척 허술한 인간이다 이거였다. 그때 문득 그 꿈들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나는 실수를 반복하고 그리고 나는 또 불안을 반복하고, 혹시 나는 실수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라는 허술한 인간이 바뀌지 않는 한 꿈은 끝나지 않는 것인가?

 

남편은 내가 도끼눈을 뜨고 있을 때면 한번씩

우리 아버지는 항상 중간만 하면 된다고 하셨단 말이야, 중간만.”

라고 말하며 자신의 실수들을 정당화 했다. 시아버지는 자신이 농부이고 공부를 많이 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녀들에게 공부든 뭐든 잘 해라고 말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당신이 살아본 경험으로 최고가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고 최고가 된 한 두 사람 외에는 다 비슷비슷하게 살더라, 그러니 그냥 중간만 하면 세상 사는 거 다 비슷하다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 덕분에 남편은 학창시절 부담 없이 중간성적을 유지했고 가끔 기분 좋으면 조금 더 올려주시고, 좋아하는 물리, 수학은 전교 1, 싫어하는 국사는 빵점을 받는 이상한 아이였다고 한다. 그래도 문제없이 잘 살고 있다고 자부했는데 나를 만나 고생이란다.

 

어떤 사람이 직장에서 남들 앞에 서야 하는 일을 하는데 남들 앞에 잘 못 서고 소심해서 고민이 많고, 직장 내에서 잘해야 한다, 실수를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서 실수를 하면 굉장히 불안해 하는 성격 때문에 고민이라고 스님에게 질문하였다.

잘 하려고 애쓰지 마세요, 못하는걸 왜 그렇게 잘하려고 애써요 차라리 잘하는걸 하지, 안 그래요? 굳이 자기를 바꿀 필요가 뭐 있어? 자기 능력에 맞게끔 직장을 구하고 과목을 찾아야지요. 그러나 정 그 일을 하고 싶으면 실력도 없는데 뭐 때문에 잘 하려고 그래요? 그건 다 욕심이란 말이에요, 떨리고 하는 거 다 욕심 때문에 오는 거예요. 그러니까 생긴 대로 내 능력껏 해본다 생각해야지, 먼저 완벽하게 해서 칭찬을 받으려고 하면 겁나서 못해요. 자기는 일을 할 때 이제 이렇게 하세요. 일단 해본다, 그 다음 평가 받는다, 평가에 따라 수정한다. 그럼 불안하지 않아요.”

언젠가 꼭 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유심히 들었던 라디오 속 이야기이다. 불안하고 떨리는 건 욕심 때문이었다. 스님의 말씀대로라면 나는 잘하지도 못하는걸 잘 하려고 발버둥치며 살았던 것이고, 실력도 없는데 칭찬받고 인정받으려는 욕심 때문에 불안에 떨고 살았던 것이다. 실제의 나는 실수투성이고 조금은 모자란 사람인데 인정하지 않고 완벽해 보이려고 애쓰니 그 동안 심리적으로 무척 힘들었다는 걸 꿈이 말해준다.

 

나는 나에게 용서를 빌었다. 그리고 내가 그 동안 가장 듣고 싶었을 것 같은 말을 해주었다.

우리 그냥 생긴 대로 살자, 너도 이제 중간만 해, 중간만

의외로 숨통이 트이고 가슴에 시원한 바람이 뚫고 지나가면서 무거운 짐들을 쓸어가 버리는 듯했다.

 

그러고는 며칠 전, 오랜만에 그 꿈이 다시 찾아왔다. 언제나처럼 학교였고 막 수업이 시작되려는데 책가방에 교과서가 또 없었다. 옆 친구의 책을 보니 그 책을 아직 주문하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났다. 불안하기 시작하던 찰나, 어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웃으며 괜찮아 오늘만 같이 보지 뭐하며 가볍게 꿈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일어나 이 이야기를 남편에게 하였다.

"어이구 이제야 숨 좀 쉬고 살겠구나" 한다.

그리고 그날은 온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 가훈을 중간만 하자로 정한 날이 되었다.

쉽게 생각하지 마라, 중간만 하는 것도 굉장히 어렵다

 

하고 너스레를 떠는 남편을 새삼 닮아가도 괜찮겠단 생각을 했다.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문세를 추억하며  (0) 2013.06.24
아비의 소금  (0) 2012.09.02
해바라기의 도전  (5) 2012.07.16
김형사 이형사  (0) 2011.07.14
선인장  (0) 201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