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너를 얼마나 업어줬는데 어휴 저게!!"
언니는 이제 싸우다 지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오래전 이야기를 또 꺼낸다.
지금 왜 언니와 싸우는 지 잊은지 오래다. 무슨일로 싸움이 시작되든 이내 10년, 20년전의 해묵은 감정들까지 쏟아져 나와선 끝도없이 지지고 뽁는게 우리다.
언니와 나는 두 살 터울이다. 지금이야 키도 덩치도 둘다 고만 고만하지만 먹은 밥 그릇 수 만큼 크는 어릴적에 4살쯤 되는 언니가 아직 아기인 날 어정쩡 한 자세로 업고서 찍은 얫날 사진이 있긴하다. 하지만 이 사진은 어른들이 우리를 잠시 데리고 노는 상황에서 나온 설정일뿐이지 같이 커가는 처지에 언니가 날 몇번이나 업어줬을까. 그리고 애가 떨어지면 어쩌라고 어른들은 말릴 생각도 않고 사진이나 찍고 있었을까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이렇게 말하는 나는 이 집의 둘째이고 밑에는 3살터울의 남동생이 있다.
둘째라는 단어에는 둘째만 아는 설움이 묻어있다. 물론 첫째는 그들대로 막내는 또 그 나름대로 고충이 있지만 대체로 존재감 없이 살아가고 있는 둘째들은 본능적으로 아둥바둥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 있는것이다.
그 설움이 컴플렉스가 되고 혹은 오기가 되어서 둘째는 강하더라, 둘째라서 자기 몫은 잘챙기더라 하는 말을 듣게 되지만 둘째들이 견디고 이겨내야만 했던 설움의 시간들을 생각하면 그 정도로는 보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뼈대있는 가문도 아니지만 아버지가 아들을 기다리던 터라 내가 태어나고 아버지는 한동안 날 소 닭보듯 데면데면 하셨다는데 준이가 나기까지 나는 엄마의 우울과 한의 젖을 먹고 자랐다. 그렇다고 내가 매사에 태생적 슬픔과 우울과 한을 품고 자란건 아니다. 그런 마음 자세로는 스믈스믈 스며들어 찰나에 내 발을 적셔 버리려하던 불행을 감당할수가 없었다. 지금껏 전쟁터 같았던 우리집에서 살아남기위해서 발빠르게 강해져야만 했다.
남동생이 나고 부턴 언니와 난 그야 말로 마이너리그, 장외의 존재가 되었지만 집안에 아들이 났다는 생각에 어렸지만 우리도 무의식적으로 한시름 놓은듯했다. 아버지의 귀가가 빨라졌고 술을 드시고 들어오는 날도 적어졌다. 언니는 "엄마가 아들을 낳았어요"라며 안면있는 동네 어른들을 만날때마다 첫인사로 소식을 전했다. 대문에 금줄을 치고 빨간 고추를 달았을때야 비로소 엄마에게 행복이 찾아왔었는지 이렇게 잠깐 집안의 화목이 봄날 벗꽃같이 만개 했었다.
집안의 행복이 벗꽃같이 피었다 바람과 함께 허무하게 져 버린 이유는 원래 허약했던 엄마가 다시 아프기 시작했으며 사랑에 굶주린 언니의 히스테리컬한 인생이 시작되었고, 장남인 준이는 집안의 영광이 되기 위한 외길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나도 이 모든 상황 가운데 놓인 것자체가 핑크가 아닌 블루계열의 인생이 펼쳐질거라는 암시 내지 복선이 펼쳐진 것이고, 본능적으로 털을 바짝세운 고양이처럼 긴장속에서 살아야만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언니는 천녀유혼의 왕조현처럼 예뻤다는건 인정한다. 게다가 학교 다니기전에 한글도 일칙 깨우치고 매사 야무지고 똑부러지는 성격으로 한때 잠깐 집안의 희망이 되었었다. 그런 언니는 학교를 제대로 나오지 못한 아버지에게 언니가 명문대생, 혹은 의사나 변호사가 될수있다는 작은 꿈을 심에 주었다. 집에 오는 손님앞에서 언니는 한글을 읽거나 숫자를 세는 시범을 보여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기도 하였는데 어릴적 기억에는 그런 언니가 무척이나 자랑스러웠고 좋았었고 그래서 언니를 보며 모방심리가 발동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부터 언니의 옷을 좋아했고, 언니의 동화책을 좋아했고, 언니의 학용품을 좋아하기 시작 하였다.
이런것들이 언니에게 히스테리컬한 삶의 태도를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나도 아니고 동생이 둘씩이나 생긴 언니는 장녀로써 먼저 누렸던 호사들을 억지로 나누자니 힘들었으리라. 게다가 준이가 나고나선 사랑을 나누는게 아니라 모두 뺐겼다고 하는게 맞으니 언니의 마음은 이제 나줘줄 옷도, 나눠 쓸 학용품도 없이 강팍해졌을 것이다.
준이의 분유를 뺏어먹거나 젖병을 빨아보는 퇴행적 행동을 보이는것은 귀엽게 봐줄수 있는것이지만 감기약이며 비오비타 같은 약까지 다 털어 먹고 쫒겨났을때 그녀는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님을 깨닳았을 것이다.
뭐 이정도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고 추억하는 유년시절의 기억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언니들과는 다르게 동생을 사랑하는 엔젤이 아닌 데블이 되어야만 했을까 이것이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궁금한 한가지 이다.
어느 책에서 사람은 가끔 선을 행하는 존재라는 이야기를 읽었을때는 그 사람이 언니라고 생각한적이 있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되면서 친구들의 자매의 이야기를 들었을때 세상 언니들이 우리 언니와는 다르다는 걸 알고 받은 충격으로 마음의 심해가 갈라지고 대형 쓰나미되어 내 뇌를 덮치고 지나갔다. 이런 고달팠던 삶이 내게만 주어진 운명이라는것을 비극의 주인공마냥 쓴 커피를 마시며 받아들여야했던 질풍노도의 시기를 감히 상상하지도 못했었다.
내가 실제로 전운을 감지했던 때는 준이를 낳고 산후조리로 몸이 약해졌던 엄마를 위해서 내가 할머니집에 맞겨졌다 6개월뒤에 돌아왔을때였다.
돌아온 나를 보며 어린 그녀는 본능적으로 백혈구가 한다는 신체방어시스템을 작동시켰다. 나는 언니에게 병균이나 마찬가지인 존재였다. 이 집에 사랑받는 여자아이는 하나면 충분하다고 언니는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없던 6개월동안 아들하나 딸하나면 충분하다는것을 눈치빠른 언니가 못 느꼈을리가 없다.
솔직히 돌아온 나도 이집에서 존재의 이유가 크게 없다는걸 살풋 느끼지 않았을까. 아들을 얻으면 딸하나 끼워 드립니다같은 상술. 잡지는 원칙적으로 부록때문에 살때가 많지만 가끔 유통기한이 다되가는 두부를 새두부에 붙여 끼워 팔기를 하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하나님의 얄팍한 상술이 날 만들었다고 생각되었다. 그치만 언니의 생각 처럼 이집에 딸이 하나만 필요하다면 내가 되는건 어떨까 하는 오기도 생겼으리라. 가히 동물적인 생존 본능이라고 말해도 좋았다. 그때 부터 언니와 나는 야생 초원의 암사자들처럼 생존을 건 싸움이 시작되었다.
*
언니는 자신이 예쁘다는 사실을 안 후부터는 타고난 장기를 살리는 길을 선택했다. 초등학교 들어가면서 부턴 언니의 꿈은 미스코리아가 되었고 그땐 여자가 공부보다야 미스코리아가 되어서 시집을 잘 간다면 그것보다 더 훌륭한 일은 없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옥영이는 공부하는데 넌 또 거울보냐는 엄마의 핀잔을 들었을때 내 팔을 물어 뜯거나 책을 발고 걷어 차버리는 때를 빼고는 미스코리아 진의 우아함을 항상 유지하려 애를썼다. 가끔 언니의 이중 적이 행동에 속이 매스꺼울때면 언니의 신발을 숨겨놓거나 아끼는 물건을 숨겨놓곤 했는데 그걸 들키는 날에는 날아오는 신발에 맞을때도 있고 내가 아끼는 물건이 산산조각이 나 있을때도 있었다. 처음 한두번은 울었다. 항상 언니가 먼저 그랬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니 언니의 처절한 응징에 차분히 생각하고 복수를 계획하는 노련함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지금에사 생각해 보는데 우리는 왜 한번도 서로 손잡고 기뻐하고 좋아해본 적이 없었을까? 때늦은 반성이나 후회가 아니라 유년기의 순순함이 서로에게 있었을텐데도 언니와 나는 서로 기뻐할 상대를 집밖에서 찾았다.
언니의 동네친구 점순언니가 집에 놀러온 일이 있었다. 두살 터울에 동네언니면 "점순언니 안녕"으로 충분한 인사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밖으로 나가는 나를 불러세웠다.
"옥영이 인사 똑바로 않하니?"
"금방 인사 했잖아. 점순언니 그지?"
"언니한테 왜 반말 하냐? 점순이가 니 친구냐?"
이러고 눈을 있는데로 흘기고 지나가는 것이 이건 숫제 깡패가 아니고선 이럴수 없다고 생각했다.
상식적인 생각을 시작할 나이에 상식밖의 괴롭힘을 생각해 내는 언니를 보면서 살아가기 위해선 장기적인 플랜이 필요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 계획엔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야망이 들어있었다.
힘으로 말빨로 이겨먹는것는 당시 초등학생으로써 불가능 했고, 공부를 열심히해서 훌륭한 사람이되어서 언니가 힘들때 절대 도와주지 않기로 결심한것이다.
물론 태어났는데 어쩔수 없이 머리가 너무 좋아서 졸고 앉았는데도 뇌량에 깊이 깊이 새겨져 "공부 하나도 않했어" 하고 올백 시험지를 받아내는 친구들도 있다는거 인정한다.
하지만 생계형으로 공부하는 사람ㅇ니 나는 도서관에서 코피 흘리고 머리를 동여매고 커피를 사약같이 들이마시고서야 9급공무원에 합격하고 눈물흘리는 그런 류의 인간인 것이다.
어찌 되었던 예뻐서 잘나가던 언니는 공부와 멀어지고, 살아가고자 바둥대던 나는 도서관에 처박혔다. 이렇게 극과 극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니 우리는 서로 안드로메다의 어느 행성들처럼 천년에 한번 스칠까말까 했고, 가끔 스칠때는 서로 부딪힐까 긴장감이 맴돌았다.
물론 이것도 태양계의 궤도를 안정적으로 돌고있는 준이와는 별개의 장외 경기로 다른 식구들은 하늘의 별구경하듯 감상한다.
우리의 이런 전쟁의 절정기는 언니가 사춘기이면서 고3이었던 그 시절이었다.
그 당시 국내 4년제 대학에는 발도 못붙일 성적을 유지하던 언니는 전의가 한풀꺽인 상태이긴 했다. 나도 고등학생이되면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는 중이었기에 초반에 우리는 암묵적 휴전 상태였다.
아버지는 장녀니까 대학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없는 돈을 쪼개서 서울대생으로 언니에게 과외를 시켜주었다.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 어느날 야자후에 집에 들어오니 낮선 신발과 함께 한층 경건해진 집 분위기 그리고 왠지 부드러워진 엄마의 목소리에 이상함을 느꼈다.
"엄마, 왜그래? 손님왔어?"
"쉿! 조용히해 이것아, 늬 언니 지금 과외중이다."
"뭐..뭐..? 과외? 누구를? "
"늬언니 성적좀 올려야 대학가지. 곧 끝나니까 여기서 기다려"
"또 언니만.....날 시켜줘, 날. 그럼 난 서울대 간다."
지금 생각하면 부모의 영광이 되기엔 싹수없긴 나도 마찬가지 였지만 늘 이런 대목에선 지고 싶지 않았다.
얼마후에 언니의 방문을 열고 가늘고 긴 혀여멀건 가래떡같이 생긴 청년이 책을끼고 나왔고 다음을 약속하며 집을 나가고 언니는 좀 상기된 얼굴로 인사후 쏙 자기 방으로 가 버린다.
눈치가 빤하다. 눈치하나로 살아가고 있는 내가 놓칠리 없지. 그 인간은 지금 공부하는게 아니라 연애를 시작할려는 참인것이다.
과외는 일주일에 두번씩 해서 한달이 지났다. 그 과외 선생이 점점 지쳐가는 기색이 보인다.
언니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남을 이해해주고 하는 성격이 아닌걸 십여년을 겪어 왔는데 하물며 수학, 국어, 영어라고 이해해줄 만큼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다.
그래도 언니는 날로 이뻐지고 있긴 했다.
하지만 그 선생은 정말 공부만 하던 가래떡이었던것 같다. 한달 하고 두주 지나서 그분은 자진 하차하셨다. 한달에 50만원이라는 그 당시 거금을 마다한 이유가 개인사정이였지만 언니의 성적을 올릴 자신이 없었던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버지는 어쩔수 없다고 하시고 엄마는 약간의 아쉬움과 허탈함을 표현하셨다.
언니는 그 후 안드로메다 저멀리 어디로 날아가버린것처럼 한집에서도 코빼기도 볼수 없었다.
어느날 저녁 10시 넘어 집에 와서 씻고 잠깐 책상에 앉았는데 언니가 백년만에 헬쑥한 얼굴을 하고는 수학문제를 내게 내말었다.
"이거 한번 풀어봐"
그것은 아주 기초적인 1학년 미분문제였고 나는 무심하게 그걸 풀어 버렸다.
언니는 꽉 닫은 입술을 살짝 달싹이고선 가타부타 말없이 나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