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단편

home sweet home

서울과 가까운 경기도의 한 재개발단지, 그곳에서 나는 올해의 첫 여름을 맞이하였다.

꼭대기 층인 나의 집은 한낮의 해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해가 기울어지고 돌아온 나를 진정 뜨겁게 맞이해 준다. 낮의 열기가 아직 가시지 않은 그곳은 금방 만두를 쪄낸 찜통 같았다.

그래도 이곳은 나의 home sweet home, 샤워 후 반라 상태로 죽은 듯 누워있어도 내 몸은 반사적으로 땀을 쥐어짜지만 나는 바보같이 이렇게 행복하다.

지난 6,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 견뎌내야 하는 도시생활에서 나에게 힘이 되어주고 의지가 되어준 건 낡고 보잘 것 없지만 그간 살아왔던 집들이었다. 내가 쉴 곳이 바로 조금씩 평수를 넓히며 위로 그리고 조금씩 서울로 가까이 가고 있는 바로 이 즐거운 나의 집뿐.

 

졸업년도에 IMF한파로 지방에선 직장다운 직장을 구하기 어려워졌다. 너도 나도 서울로 취직하려고 철새처럼 떠날 때 나도 그들 무리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새장 문이 열려 있는 줄도 모르고 살던 새가 어느 날 무심코 밀었더니 문이 열렸고 그는 훌쩍 떠나버렸다는 동화처럼 그렇게 나는 24년을 살아온 고향을 등지고 먹이를 찾아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나는 작은 IT 회사에 자격증 하나 달랑 들고 취업을 했고 첫 보금자리는 잠실의 지하 월세방이었다. 먼저 올라갔던 친구가 나는 그렇게 시작했어하던 말에 주저 없이 선택한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30만원의 방은 시골처녀의 존엄성을 딱 300만원어치정도만 보장해 주었다.

여름만 되면 까만곰팡이가 아라베스크 무늬를 만들며 피어오르고 습기로 인해 옷과 이불이 눅진해진 틈에 곰팡이 포자가 날아와 앉았다. 장마가 본격적일 때면 지상으로 나있던 창을 통해서 물이 줄줄 흘러 들어왔는데 그물을 받아다가 다시 지상으로 옮겨다 놓기를 밤새워 했었다. 만정이 떨어졌지만 1년은 그 집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인턴이라는 이름으로 6개월을 생활비정도의 월급만으로 버텨야 했기 때문이다. 밤이면 누워서 A4 용지만한 창으로 지나가는 사람의 다리를 별을 세듯 세어가며 잠이 들었을 때 새장에서 주던 모이만 받아먹던 새에게 스스로 먹이를 잡고 보금자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야생은 눈물 그 자체였다.

가끔씩 고향에서 철장같이 차가운 엄마의 전화가 오면 괜찮아요, 잘 지내요, 걱정 마세요 하며 엄마를 최면 시키고, 그 말은 또 내 귀에 마약 같이 다가와서는 눈물을 머금고도 웃게 만들었다. 힘들면 돌아오라는 말들을 두 손에 고이 받아놓았지만 그것은 물속에서 나온 물고기처럼 이내 생명력을 잃었고 나는 망설임 없이 그 말을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집을 나올 때 나는 취업바람을 타고 나왔지만 그전부터 나를 밀어내고 있었던 바람에도 떠밀려 나왔다. 중학교 때 아버지의 재혼으로 등장한 새엄마 그리고 1년 뒤 태어난 남동생, 그들은 순식간에 진정한 한 가족이 되었고 반면 나는 철장 속에 가둬진 채 행복한 그들을 바라만 보아야 하는 새가 되었다. 그들이 나를 나쁘게 대하거나 하진 않았다. 때 되면 밥을 주고 물을 주고 가족이에요 소개도 해주었지만 나는 그들과 공통분모가 될 수 있는 엄마를 온전히 공유 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나를 떠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우연히 서울에 이력서를 냈다가 서류전형은 합격하셨으니 면접 보러오세요 하는 전화를 받고 떠날 준비를 할 때 그동안 내 취업에 관심도 없던 온 가족이 너무 기뻐하는 모습은 오히려 나를 서글프게 한건 내가 예민해서만 일까. 이렇게 나는 내 둥지에 알을 놓은 뻐꾸기에 의해 영문도 모르고 내던져지듯 나의 집을 떠나왔다.

두 평 남짓한 지하 원룸생활은 1년 조금 지나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조금 벋어나기로 결심하자 그나마 지상에 있는 연립주택의 한 칸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집은 보증금 500만원에 월세30으로 나는 조금 개선된 존엄성을 임대했다.

하지만 그 집도 빽빽이 들어차 있는 다른 연립 주택들 때문에 365일 하루도 해가 들어오는 날이 없었다. 게다가 1층이라 오가는 사람 때문에 창을 열어 놓을 수도 문을 열어 놓을 수도 없는 집이었다. 그냥 장마철 물난리만 피할 수 있는 정도의 집을 200만원을 더 주고 구한 것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회사에서 집이 멀어져서 퇴근하는 시간이 늦어졌고, 콩나물같이 끼여서 오가는 출퇴근길은 새롭게 내게 주어진 난리라면 난리가 되었다.

저녁 9시가 넘은 시간에 집에 들어오면 지하의 집이나 별반 다를 것 없는 공기냄새를 맡으며 씻기가 무섭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6시에 울리는 알람을 들으며 일어나 비몽사몽간에 김과 밥을 차례로 입에 넣고 물을 마시고 집을 나왔다. 1시간가량을 서서가는 지하철속의 사람들은 빙하기에 먹을 것을 구하러 떠나는 한 무리의 굶주린 짐승 떼 같았다. 거기서 잠깐이라도 졸거나 방심 했을 땐 사냥감이 되어 한쪽 엉덩이를 변태에게 내어주어야 하거나 가방엔 구멍이 뚫리고 지갑이 사라지게 되는 봉변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매일의 난리 속에서 피곤한 눈을 비벼가며 나는 무사히 여름을 나고 가을을 맞이했고 이정도면 견딜만한 날이라 생각하며 몇 달을 보내게 되었다.

그해 가을로 계절이 바뀔 때 오랜만에 대청소를 하다가 창밑으로 인터넷 케이블과 TV, 전화선이 들어오도록 뚫어놓은 구멍을 발견했다. 나는 TV도 전화기도 없었기 때문에 그 구멍은 휑하니 뚫려 있었다. 그것은 밖에서 보면 안이 훤히 보일정도로 커서 구명을 발견하고선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얼른 휴지를 말아 케이블 틈 사이를 막아버렸다.

그러고 10여일 지난 뒤에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그 구멍의 휴지가 안쪽으로 빠져나와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처음에는 바람이 불어 선이 흔들려 빠졌겠거니 생각을 하고 다시 꼭 끼워서 안쪽으로는 테이프로 막아 놓았다.

하지만 며칠 뒤 붙여 논 테이프가 누군가가 흔들어 놓은 것처럼 뜯겨져 있었을 때 그 구멍은 목 밑에 바짝 붙은 총구처럼 나에게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하루 온종일 집을 비우고 있으니 누가 이런 짓을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 동안 지쳐 집에 들어와서는 거리낌 없이 옷을 벗어던지고 샤워를 했던 일, 창문을 열수 없어 속옷 바람으로 방안을 돌아다닌 일을 생각하면 내장까지 곤두설 지경이었다.

주인할아버지를 만나 이야기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주인 영감은 평생 막노동을 해서 4층이나 되는 이 다세대 주택과 시내 점포 몇 개를 소유하고 있는 부자라고 했다. 요즘 그 일대에 ktx역사가 생긴다는 소문에 작년부터 집값이며 땅값이며 슬금슬금 오르고 있어서 주인영감은 돈 꽤나 벌었을 거라고 부동산 주인이 계약을 하며 이야기해 주었다. 그 영감은 늘 큰 공구 가방을 들고 그의 사랑하는 집을 갈고 닦았다. 조금은 구두쇠 같은 영감이었지만 고생해서 그렇게 자수성가한 그가 부럽기도 했다.

그날 그는 2층 계단의 부서진 모서리를 수리하고 있었다.

저기 할아버지 제방 창 밑에 구멍이 있는데요, 밖에서 보니까 안이 다보여서 그러는데 좀 막아 주실 수 없나요? 제가 안에서 막아 놓으면 금방 떨어지더라고요.”

그는 일하던 손을 멈추고 나를 잠깐 쳐다보고는 다시 일을 하기 시작했다.

않돼. 아가씨가 TV 안 본다고 그거 막아놓으면 다른 이가 오면 또 뚫을 거야 어쩔 거야. 거기 구멍이 있는지 아는 사람도 없어. 신경쓰지말어. ”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할아버지가 아시잖아요라고는 차마 말은 못하고 돌아서야만 했다.

나는 그냥 돌아 와서 구멍위로 큰 달력 하나를 걸었다. 안쪽으로 붙여놓은 테이프는 이미 너덜너덜 떨어져 무용지물이었다. 분명 누군가 밖에서 선을 일부러 흔들었을 것이다.

그 후로 나는 누군가 달력을 들추고 방으로 들어오는 꿈을 가끔 꾸었다. 큰 눈이 한 개인 시커먼 인간과 눈이 마주쳤을 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버버 하고 살려달라는 소리가 입안을 맴돌 뿐이었다.

어쩔 수없이 다시 새 집을 구해보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보증금 500만원에 그동안 모은 500만원을 가지고는 편한 마음으로 잠만이라도 잘 수 있는 곳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곳에서 습한 밑바닥만 기어 다니는 다지곤충과 같은 인생이 언제까지 계속될지 알 수 없어 더 답답한 나날들이었다. 직장생활한지 2년이 다되어가지만 말단사원인 나는 일 년에 10만원도 오르지 않는 월급 통장만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외근을 나갔다 오랜만에 일찍 퇴근해 컵라면을 흔들며 대문을 들어서는데 그 영감이 내 방의 케이블을 쥐고 흔드는걸 보았다. 내가 오는 시간이 아니라서 그런지 부스럭거리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케이블을 들고 구멍을 들여다봤다 흔들었다 하는 것이었다.

몇 걸음을 더 다가가 멈추었다. 영감은 그제야 이쪽을 쳐다보았고 나라는 것이 2초 뒤에야 확인이 되었는지 딱 2초 만에 그는 손에 쥔 드라이버를 떨어뜨리고 끙 하고는 앓는 소리를 냈다.

거기서 뭐하고 계세요? 뭐하고 계시냐구요?” 나도 모르게 격앙되어 갈라진 목소리로 악을 쓰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허겁지겁 연장을 챙기고는 뒤돌아서 뛰어 가버렸다.

“1층 아가씨 왜 그래?”

4층 주인집에서 주인 할머니가 빠끔히 아래를 내다보았다.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를 끌고 올라가 할머니 앞에서 자초지정을 이야기 하였다. 그러고는 수일 내로 방 빼겠다고 이야기하고는 돌아섰다.

그녀는 아가씨가 막아 달랬으니까 아저씨가 막아 주는 거 아니냐.” 고 오히려 쏘아붙였다.

저녁에 친구를 만나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부모님이 집을 사주었다는 친구의 원룸에서 한동안 신세를 졌다. 나는 어디든 최소 2층 이상은 올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서울과 서울근교 일대의 집들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내 지갑에 당첨되지 않은 로또복권도 차곡차곡 쌓여갔다.

 

서울, 기회의 도시라는 광고를 싣고 달리는 지하철을 매일 타고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지만 달리는 기회를 나는 잠깐 타고 내릴 뿐 붙잡을 수는 없었다. 겨우 2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나에게 기회는 이방나라에서 들려오는 소문과 같은 것처럼 느껴졌다. 간혹 기회를 잡아오는 친구를 보면 그것이 자신이 잡은 것이라기보다는 부모가 물어다주는 것일 경우가 더 많았다.

넓은 서울 땅덩어리에 내게 허락된 공간이 지하월세이거나 변태가 서식하는 음지밖에 없는 것일까? 한강변에 높이 올라서 있는 으리으리한 아파트를 기회로 잡고 사는 사람들은 우리와는 다른 환경에 사는 다른 종의 생물 같았다.

다행이 친구는 집을 구할 때 까지 편히 있으라고 해주었다. 나는 일단 그 집에서 짐을 빼고 돈을 돌려받고 집구하기에 전념하였다. 편히 있으라고는 했지만 주말엔 집구하러 다니고 주중에는 최대한 늦게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왔다. 혼자만 생활하던 사람이 가족이 아닌 누군가와 공간을 나눈다는 것은 보통 예민한 일이 아니라는 걸 어린 시절 겪었기 때문에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주말엔 온종일 부동산을 전전긍긍하다 저녁엔 한강에 가서 컵라면으로 허기를 때우며 공짜라서 좋은 서울하늘과 강을 지겹도록 바라보다 돌아왔다.

얘 어딜 그렇게 쏘다니니?”

늦게 까지 TV를 보며 맥주를 마시고 있던 친구가 내가 들어오는걸 보고는 냉큼 일어난다. “집은 구했어?” 나는 아 뉘하며 웃어보였다.

금방 만수선배한테서 전화 왔는데 개발자 티오가 있는데 너 오지 않겠냐고 물어보더라. 전에 내가 우리 집에 너 잠시 있다고 선배한테 예기했었거든, 선배회사 지금 다니는 너네 회사보다 큰 거 알지? 연봉도 올려 받을 수 있을 거야. 선배가 너 성실하다고 옛날부터 좋아 했잖아.”

풍문으로만 들리던 그랬다더라의 주인공이 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동안 다시 고향으로 내려갈까 고민 한 적도 많았지만 적당한 시기에 내게 딱 적절한 양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게 안락한 집만큼이나 적절한 위로를 가져다주었다.

회사도 옮기고 대출을 조금 받아 회사 근처의 원룸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차곡차곡 저축해 나갔다. 4년차 정도부턴 회사일 외에 가끔 프리랜서도 뛰면서 나는 조금씩 진화를 해갔다. 밑바닥만 기던 곤충의 등에 날개가 자란 것이다.

그때쯤에 나는 사람에겐 항상 준비된 만큼의 기회가 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로또 따위는 잊은 지 오래되었다. 그리고 나는 올해 초에 광명 재개발단지에 전세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무려 5층까지 나는 날아 올라온 것이다. 지하에서 부터 시작한 나로서는 지금의 5, 이곳은 어마어마하게 황홀하고 아름다운 천국과 같은 곳이었다. 비록 벽지는 낡아서 누렇게 변색되었고 싱크대는 오래된 물때로 얼룩져 있었으며 앞뒤 베란다의 새시는 틈이 벌어져서 비가 새지만 창을 열면 상쾌한 바람이 불어오고 해가 빛나고 떨어지는 첫 비를 맞을 수 있는 그곳은 내게 많은 것을 허락해 주었다. 하늘을 바라보면 서울의 해, , 별을 공유하게 된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을 나는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살았던 그 집들에 지금 옛날의 나처럼 누군가가 살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내가 살고 싶은 집에도 누군가가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모두가 나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서로다른 이종의 생명체가 아니라 그들도 나처럼 기회의 전차를 타고 앞으로 혹은 뒤로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인 것이다. 그러면서 나와 그들은 각자가 가고 싶은 곳을 향해 가는 것이다.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곳은 조금 더 높고 조금 더 서울중심과 가까운 곳이지만 이렇게 평화롭고 편안한 기분을 느끼는 요즘에는 이대로도 좋다고 생각한다. 서울이 내게 허락한 공간이 앞으로 얼마큼이 될 진 모르지만 여긴 나의 진정한 home sweet home 이라고 생각한다.

 

 

 

 

 

 

 

'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 여름밤의 기억  (0) 2013.09.23
대재앙  (0) 2013.08.26
언니가 집나갔다!!  (0) 2013.07.04
이문세를 추억하며  (0) 2013.06.24
아비의 소금  (0) 2012.09.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