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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추천도서

쌍화점에서 역사적 사실은 어디까지?

 

 

영화 쌍화점을 보며 저 이야기가 사실일까 의구심이들어 초록창에 검색을 해 보았다.

 

재위 초반과는 다른 공민왕 집권 후반기의 모습들

재위 초반 고려의 자주독립과 여러 개혁정치에 노력을 기운 공민왕이었지만, 정치가로서의 운명은 불우했다. 복잡한 국제정세 속에 반란과 잦은 전쟁은 공민왕의 인격을 파탄 냈고, 노국대장공주의 죽음은 그를 폐인으로 만들었다. 절제와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왕이었지만, 노국대장공주의 죽음과 정치적 고독감을 이기지 못해 지나치게 성적인 것만 탐닉하는 왕이 되었다. 전대 왕들의 사치를 비판하며 백성의 생활을 걱정하던 그였지만, 말년에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대규모의 토목공사를 강행했다.

 

공민왕은 신돈이 실각한 뒤로 이상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자제위(子弟衛)를 두어 나이 어린 미소년들을 뽑고는 동성애와 관음증에 빠져 지내기 일쑤였다. 자제위는 형식상 왕의 경호를 위한 귀족 자제들의 집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들 자제위 미소년들과 기괴한 유희를 즐겼다. 너무 열중한 나머지 휴가도 주지 않았다.

 

공민왕은 태후가 우를 세자로 허락해 주지 않자, 다시 후사를 걱정하였다. 급기야 홍윤 등 자제위들의 불만을 잠재우면서 동시에 비빈들을 임신시킬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공민왕은 홍윤·한안 등 자제위 출신들과 그의 비빈들을 억지로 간음하게 하여 왕자를 얻으려는 희망을 품었으나 정비·혜비·신비 등 3비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공민왕은 마지막으로 익비를 김흥경과 홍윤·한안 등이 간음하도록 했다. 이때 익비 역시 거부하자 공민왕은 칼로 위협하며 강제로 간음을 시켰고, 이후 익비는 임신을 하였다.

 

 

잔인하게 시해를 당한 고려의 마지막 등불 공민왕

공민왕은 익비를 임신시킨 홍윤과 이 사실을 아는 최만생을 없애고자 했다. 1374년(공민왕 23년) 9월 21일 밤, 침전에 들어간 최만생과 홍윤 등은 술에 취해 정신없이 자는 공민왕의 온몸을 칼로 마구 찔러댔다. 이들이 휘두른 칼에 공민왕은 뇌수가 벽에 튀어 붙을 정도로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때 공민왕의 나이 45세였다. 그 뒤 최만생·홍윤·한안·권진 등은 왕을 시해한 죄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그들의 나머지 친족도 모두 잡혀 유배되거나 노비가 되었다.

 

고려의 등불 같은 존재였던 공민왕이었지만, 그의 죽음은 이처럼 처참하고 허무했다. 고려의 역대 제왕은 태조 이후로 원종까지 본국에서 시호와 묘호를 지었으나, 원나라 간섭을 받게 된 충렬왕대부터는 원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을 뿐 묘호는 붙이지 못했다. 공민왕대에 명나라가 강성해지자 고려의 대외관계도 크게 바뀌어 공민왕의 시호인 ‘공민(恭愍)’은 명나라에서 받은 것이었다. 본국에서는 공민왕에게 ‘경효(慶孝)’라는 시호를 추증했다. 그 뒤의 우왕과 창왕은 모두 폐시(廢弑)되어 시호가 없고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새 왕조 조선에서 추증한 것이다.

 

  정성희 /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글쓴이 정성희는 역사연구가로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있는 역사’를 발굴해 내는 일에 전념하고 있으며, 현재는 ‘21세기와 실학’이라는 주제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다.

 

 

그럼 여기서 송지효의 역할은 익비였었다.

 

영화 초반에 기철등을 처리하는 장면도 있었고 (공민왕 5년) 송지효가 원나라 공주라고 이야기 했기때문에 헷갈리는 부분이 있었다.다시확인해 봐야 겠는데..

 

약간의 왜곡은 있었지만 공민왕이 자제위라는 것을 만들어 기괴한 짓을 한것은 사실인것 같다...

 

별나지만 어딘지 짠한 역사의 피해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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