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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착한남자 송호

[착한 남자 송호]

 

-거북이-

 

까무잡잡한 피부, 165cm정도 돼 보이는 작은 키, 정리가 되지 않은 굵은 모발, 안경에 가린 작은 눈, 소도 때려잡을 것 같이 큰 손발, 듬성듬성 여드름이 나있는 피부, 내성적으로 보이는 수줍은 눈빛.. 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아무도 모르게 속으로 웃었다. 엔지니어 팀의 차장님께서 직접 뽑으신 사원이라며 그를 소개 시킬 때 분명 차장님의 사촌조카이거나 막내처남이 아니고서야 막 농사를 짓다 올라온 것 같은 저런 사람을 뽑았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김송호라고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그는 굉장히 수줍어하며 인사를 했고 차장님의 장황한 조회가 끝나고 나서는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회사는 작은 빌딩의 두 층을 임대해 한 층은 엔지니어 팀이 다른 층은 소프트웨어 팀이 나누어 쓰고 있었다. 그러나 소프트웨어 팀의 직원 수가 많지 않다보니 차장님과 김송호씨가 급하게 우리 층에 자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파티션으로 나뉜 그의 자리가 정수기 앞에 서니 보였다. 나는 커피를 타며 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희귀해 보였다. 마치 멸종위기의 검은 코뿔소 같았다. 게다가 잔소리 많은 최차장님의 바로 뒤에 앉아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이 곧 사라질 듯 불안해 보이기까지 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그가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란 직감이 들었다.

나는 정수기 옆에 비스듬히 서서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였다.

나이가 28살이라고 했나? 그 나이에 여기가 첫 직장이라면 백수 생활을 오래 했구먼, 안 봐도 척이지 뭐. 지방대학 나와서 스펙 딸려, 영어 안 돼, 여기 저기 이력서 썼다 떨어졌겠지. 남자들이 군대 갔다 오면 26살이거나 27살일 텐데, 늦어도 너무 늦었네. 게다가 최차장님 등살에 여기도 오래 못 버티게 생겼으니... 젊은 나이에 안됐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리고 책상정리를 하다 눈을 든 송호씨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머리를 그적이며 하얀 이를 드러내며 수줍게 웃었다.

웃는 거 하나는 맘에 드네.’

나는 4년차 직장인으로써 여유롭게 그에게 웃어 보이며 내 자리로 돌아왔다.

 

나는 이 회사에 들어온 지 4년 만에 대리를 달았다. 대리를 달 때 초스피드 진급이라며 다를 부러워했다. 나름 열심히 한 덕이기도 하지만 바로 위의 상사인 김과장이 뒤에서 많이 도와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와 나는 2년 정도 몰래 사내연애를 했다. 몰래 일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에게 결혼 이야기가 오가던 약혼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그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그에게 아무런 감정도 없었는데 그의 돌발적인 고백에 마음이 흔들려 버린 것이다. 나는 당연히 그가 약혼녀와 헤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나에게 그렇게 배짱 좋게 고백했던 그 모습은 어디로 가고 그는 지지부진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더니 3개월 전에 그녀와 결혼해 버린 것이다. 황당하고 억울하고 가슴이 아픈 이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 회사를 그만 두려고 했을 때 그가 집으로 찾아와서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져 잠시 고민한다는 것이 3개월이 지나버렸다. 그는 가끔 나를 찾아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고 이야기를 하였다. 순한 그의 눈망울에 눈물이 맺히는 것을 보면 그의 마음이 진심일거라고 나도 모르게 믿게 되는 것이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 그러니까 기다려 보자.’

이렇게 나는 다시 헛된 꿈을 꾸며 그를 기다럈고, 그는 내 마음이 변함없다는 것을 확인하면 안심하며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며칠을 송호씨를 지켜보았다. 그는 예상한 대로 굼떴다. 성실하기라도 해야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는 내 기대치에 못 미치게 굼떴다.

그와는 다른 부서이지만 같은 층에 있다는 이유로 우리는 함께 밥을 먹으러 다녔다. 식당에 앉아서 각자 주문을 할 때면 그는 항상 뭘 먹을지 고민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그러다가 성격 급한 내가 눈이라도 흘기면 그는 식은땀을 흘리며 결국 같은 걸로라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러곤 그는 나에게 미안한 듯 웃어 보인다.

송호씨 참 착해.”

옆에 있던 김광호씨가 이야기했다.

아이...아닙니다.”

뭘 아니야. 내가 다 봤는데. 한대리한테 꼼짝도 못 하네.”

광호씨, 또 송호씨랑 엮으려고 수작부리지 마세요. 직책이 내가 한참 위니까 당연히 눈치 봐야죠.”

나는 광호씨의 눈치가 빤했기 때문에 먼저 선수를 쳤다.

둘이 나이도 같겠다. 친구 하라고 그러는 거죠, 참 한 대리님 너무 예민하시네요.”

나는 그때 잠깐 김과장의 얼굴을 보았다. 물그릇만 빙빙 돌리며 우리 이야기를 들으며 웃고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이제는 알 수가 없었다.

자 다들 빨리 먹고 가서 대청소하자구

나는 조용히 밥을 먹었지만 답답함을 느꼈다. 모두들 즐거운지 수저가 오가는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밥을 잘 못 드시네요.”

송호씨가 정말로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내 앞에 물을 갖다 주며 쳐다보았다.

그러나 나는 그의 물 잔을 슬그머니 밀어버리고 고개를 돌렸다.

 

나는 사무실에 먼저 들어와 창문을 모두 열어젖혔다. 뒤따라 들어온 사람들이 각자 청소도구를 들고서는 청소를 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걸레를 깨끗이 빨아서 직원들의 책상을 닦아 주었다.

개발자들이라 책상은 모두 깨끗했다. 피규어를 만들어 올려놓은 사람도 있었고, 여자 친구의 사진이 있는 자리도 있었다. 여직원들은 작은 식물을 기르는 것이 유행이어서 선인장이나 다육이가 심긴 화분을 올려 놓았다. 김과장의 책상에는 신혼여행에서 찍은 사진이 올려져 있었다. 그가 내게 했던 말들이 모두 거짓말인 것처럼 그들은 누가 봐도 행복해 보였다. 내가 그 사진을 보고 있을 때 김과장이 들어왔다. 그는 당황해 하며 내게로 다가 와서는 사진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내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는 얼른 그 자리를 빠져 나왔고 그와 빨리 끝내야한다고 생각을 했다.

저기...한대리님

송호씨가 나를 불렀다.

걸레 좀 주시겠어요?” 그는 자신의 책상을 닦으려는지 내게 손을 내밀었다.

... 아니 제가 닦아 드릴게요, 송호씨는 바닥청소 부탁할게요.”

그는 잠시 멈짓하더니 밀대걸레를 찾으러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의 책상을 걸레의 깨끗한 부분을 찾아 닦아 주었다. 온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책상에는 물건이 많이 없었다. 노트북 하나와 여러 장의 음악시디뿐이었다. 밀대걸레를 찾으러 나간 그는 한참 만에 들어왔고 굼뜨지만 않았다면 흠이 없을 정도로 멋지게 걸레질을 했다.

나는 커피를 타 들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그들은 웃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대체로 이런 자리엔 최차장을 씹는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날따라 광호씨는 누군가를 칭찬하고 있었다.

송호씨 참 착해. 말도 잘 안하는 것 같은 데 조곤조곤 할 말 다 하고. 같이 있으면 기분이 좋아진단 말이야.”

그래요? 그렇게 안 보이는데?”

나는 이야기를 더 들어보려고 궁금해 하는 척을 했다.

남자들끼리는 알지. 입사한지 얼마 되지 않아도 우리는 같이 담배를 피우는 사이잖아. 몇 마디 해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송호씨가 학교 선배와 선배 여동생이 같이 산다는데 선배가 송호씨를 얼마나 믿으면 그러겠어.”

....말이 안 돼. 그걸로 착하다고 하기엔.....”

..한대리님은 남자를 몰라서 그래요. 남자가 남자를 착하다고 하기가 쉬운 줄 아세요? 암튼 그래요.”

나는 더 말할 필요도 없는 것 같아 자리를 떴다.

남자들이 말하는 착한 여자는 얼굴이 예뻐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나도 마찬가지다. 착한 남자는 일단 키가 적어도 170cm이상은 되어야 한다. 여기서 선택적으로 작은 조건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막내여야 한다거나, 작장이 탄탄하다거나, 집안이 좀 괜찮다거나, 대머리가 아닌 경우에 한해서 성격이 착해야 착한 남자인 것이다. 이런 조건을 생각해 보면 송호씨는 아무리 성격이 착해도 착한 남자가 아닌 것이다.

 

한달 뒤 송호씨의 환영회가 있었다. 그는 나의 예상을 깨고 최차장의 미친 성격을 잘 참아내고 있었다. 2층의 직원들만 하는 회식 겸 환영회 자리라 출장 갔던 직원까지 모두 모였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돼지갈비 냄새와 기포를 머금으며 찰랑대는 소주는 힘들고 지친 내가 여지껏 회사에 버티고 다니게 해준 이유였다. 나는 평소에 친하게 지내는 총무과의 숙자언니와 함께 앉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김과장은 나를 의식했는지 저 멀리 테이블 끝에 앉았다. 나와 말이 잘 통하는 배영필 대리 그리고 최근에 배영필 대리와 친하게 지내는 송호씨 그리고 광호씨가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모여 앉았다. 회식을 할 때 기분 좋은 이유가 여기 있었다. 평소에는 일하느라 딱딱할 수밖에 없었지만 마음 통하는 사람과 웃으며 떠들고 놀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면 우리는 친구처럼 되어 버린다.

배대리님은 요즘 송호씨와 친하게 지내시나봐요?”

나는 요즘 부쩍 붙어 다니는 둘을 보며 궁금했던 것들을 물어 보았다.

. 이 친구 참 괜찮아. 착해서 내가 데리고 다니지. 그렇지?”

배대리는 송호씨를 보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사람들이 왜 송호씨만 보면 착하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한 대리가 직접 격어봐.”

옆에서 벌써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송호씨가 헤헤 하며 머리를 그적인다.

암튼 입사 축하하고요. 지옥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큭큭큭, 한 대리 최차장이 들으면 찍힌다구.”

, 조심. 참 그런데 송호씨, 어떻게 최차장의 잔소리를 견디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아니에요. 견디기는요.”

그는 다시 머리를 그적이며 짧게 대답했다.

한대리, 난 송호씨가 남의 험담 하는 것 못 들어봤어. 이사람 곧 죽어도 남의 험담은 안해.”

~~ 멋지네요. 그런 의미에서 한 잔!!”

지글거리는 고기 굽는 소리와 맑게 울리는 소주잔 부딪치는 소리가 마음을 들뜨게 했다.

송호씨도 기분이 좋은지 평소보다 더 많이 웃고 있었다.

멀리서 김과장이 가방을 들고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김과장님 표현은 안 해도 무척 애처가시네. 지금 부인이 아프다고 집에 가신다잖아.”

숙자 언니가 고기를 뒤집으며 이야기 했다.

그래요?”

나는 모르는 사람의 일인 것처럼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을 나서는 김과장의 뒷모습을 보았다.

나는 갑자기 취기가 올라 머리가 어지러웠다. 배대리와 숙자언니 광호씨 그리고 송호씨가 왁자지껄 웃으며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대리, 오늘 술이 받나봐. 많이 마시네배대리가 농담처럼 이야기 했다.

, 저 오늘 술이 달아요.”

그래? 그럼 우리끼리 2차가지구.”

~~”

나는 더 미친 듯이 웃으며 즐거운 척을 했다. 아니 그러고 싶었다.

회식자리가 끝나고 나오려는데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로 급히 뛰어갔다. 속에 것이 한꺼번에 변기 속으로 쏟아져 나왔다. 목구멍이 따가워서 눈물이 났다.

한대리님 괜찮으세요?”

송호씨였다.

송호씨?”

.”

“28살이랬어요?”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그를 쳐다보며 물었다.

.”

그럼 이제부터 나랑 친구해요. 동갑이니까.”

그래요.”

의외로 그는 망설임없이 대답했다. 오히려 내가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술이 취하니 이 남자도 용감해 지는구나하고 생각을 했다.

우리는 즐겁게 2차까지 하고 12시가 다 되서 서로 헤어졌다. 물론 배대리님과 송호씨와 광호씨가 숙자언니와 나를 집에 데려다 주고 그들은 더 늦게 돌아갔다. 회사생활을 하며 얻은 의리 있는 친구들이라고 생각했다.

 

회식을 하고나면 최소 한주는 지치지 않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었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서로 얼굴만 봐도 즐겁게 된다. 하지만 그 약발은 두 주째가 되면 다 떨어져 버리고 서로 예민해지지 않게 눈치를 보며 조심하게 된다. 나는 그 후 두 주째 되던 날 송호씨와 배대리와 김과장과 함께 멀리 대전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큰 프로젝트를 마무리해야 하는 것이라 모두들 긴장을 하고 있었다. 송호씨만 빼고 말이다. 그는 내심 이 출장에 신이 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는 최차장님의 부탁으로 현장 체험을 가는 중이었다.

일주일 뒤에 공사가 끝나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프로그램에는 많은 오류가 있었다.

우리는 현장에 도착해서 서로에게 말도 걸지 않고 맡은바 일에 집중을 하였다. 그리고 송호씨는 이런 저런 문서들을 챙기며 필요한 심부름을 하고 있었다.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을 하다 김과장의 지시로 배대리와 송호씨가 먼저 밥을 먹으러 가고 그 뒤에 우리가 밥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남은 우리는 어색하게 서로의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김과장의 전화벨이 울렸다.

..그래..잠시만..” 하고는 그는 자리를 피했다.

나는 일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면 정말 그와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화장실에 갔다. 공교롭게도 남자 화장실 세면대 앞에 그가 있었다.

..자기, 몸은 괜찮아? 병원 갔다 왔고? ..그래.. 아기는 건강한거지?”

나는 순간 앞이 캄캄해져 왔다. 이 사람은 무슨 생각으로 사는 사람일까? 이 사람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책임질 수도 없는 사람에게 기다리라는 희망을 준 것은 어떤 심보일까? 그는 세면대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서있는 나를 발견했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 사이에 몇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다가 왔다.

그게 미주야. 어떻게 된 일이냐면..”

나는 뒷말을 들을 생각도 없이 그의 따귀를 있는 힘껏 때렸다. 그의 안경이 떨어져 나갔다.

말 안 해도 끝 인거 알지?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아. 변명 같은 거 할 생각 하지마.”

그리고 나는 자리로 돌아왔다. 밥을 다 먹고 돌아온 둘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얼굴이 하예서 들어오는 나를 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곧이어 부러진 안경을 들고 들어오는 과장님을 보면서도 그들은 침묵했다.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 되었다. 김과장은 아무 일 없듯이 평소대로 행동했으며 나는 나대로 마음을 다잡았다. 이별은 생각보다 아프지 않았다. 그와 만나는 동안 항상 준비해온 이별이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나머지 둘이 우리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일이 잘 마무리 되고 마지막 날 밥을 먹으며 우리는 반주를 한잔 씩 했다.

모두 수고했어요김과장은 사람 좋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배대리와 송호씨는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뭔가 다른 것을 상상하는 듯 했다. 나는 피식 웃음이 났다. 아무튼 나는 홀가분했고, 내편이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밥을 먹는 중 김과장의 전화가 울렸다. 요즘 부쩍 전화가 자주 왔다. 그리고 그는 이제 대놓고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그가 불편했다. 그는 한참 통화를 하더니 계산을 하고 먼저 숙소로 들어갔다.

남은 우리는 말없이 한잔씩 술을 마셨다.

..한대리님. 괞찮으십니까?” 송호씨가 나의 눈치를 살피며 물어보았다.

? 뭐가요?”

..그날..얼굴이 하예져서 들어왔잖아. 김과장이랑 별일 없었어?” 배대리가 말을 가로채었다.

... 아무일도 없었어요.”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무슨 일 있나하고 걱정했지. 앞으로 한 대리 이런 출장 따라다니지 마. 내가 다 할테니까?”

고맙지만 그럼 사모님이 이혼하자면 어떡해요? 전 괜찮아요.”

그럼..제가 대신 다닐게요. 한 대리님. 저는 부인도 없고...”

하하하...고맙지만 사양할게요. 한잔들 합시다. 오늘 술맛 좋네요.”

정말 술맛이 달았다. 나는 김과장의 실체를 알아버린 기분이었고, 간사한 그와 헤어진 것이 오히려 감사하다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 더는 김과장과 같이 일 할 수 없을 것이고 나는 회사를 나가야 할 것 같았다. 단지 마음 아픈 건, 이 좋은 사람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술이 한참 오가고 기분이 최고였다.

친구야, 우리 친구 하기로 했잖아.” 송호씨가 어느새 말을 놓았다. 이 남자는 술을 마시면 용감해지는 것이 확실했다.

그래. 그렇지.”

배대리는 취했는지 옆에서 졸고 있었다.

힘내라. 내가 항상 지켜줄게.”

진지하게 말하지마, 어색해.”

아냐, 나 정말 너 좋아해.” 나는 술기운에 이 말을 가볍게 받아 넘겨버렸다.

왜 날 좋아해?” 헤롱헤롱한 정신으로 나는 장난치듯 물었다.

예쁘잖아.”

하하하..배대리님, 송호가 나더러 예쁘데요. 웃기죠?”

? 뭐라고? 얘 술됬네.” 자다 깬 배대리는 시계를 보며 주섬주섬 일어났다.

우리도 아무일 없다는 듯이 짐을 챙겨 일어나 각자의 숙소로 돌아갔다.

 

 

회사의 일이 정리가 되었다. 나는 사표를 제출했고, 하고 있던 프로젝트도 광호씨에게 잘 인수했다. 당장 옮길 회사가 정해지지 않아 나는 당분간 고향에 내려갈 생각이었다.

단지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은 친구 같이 정을 나누고 지내던 동료들이었다. 회사를 그만 두는 날은 정확히 3주 뒤였다. 우리는 매일송별회라는 이름으로 술을 마셨다. 대체로 팀 모두가 모였고 가끔 한두 명씩 빠졌다. 하지만 항상 빠지지 않는 사람은 송호였다. 언제 부턴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옆에 딱 붙어서 술을 마셨고 마지막엔 나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다. 술자리에선 우리는 반말을 하였고, 친구라고 불렀다. 나는 정말로 그가 친구로서 좋았다. 사람들이 그가 착하고 편하다고 한말들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정말로 마지막 날이 되었다. 마지막 날에는 최차장과 김과장도 자리에 참석했고 공식적으로 나의 송별회가 이루어졌다. 마지막까지 나를 챙겨준 동료들이 너무 고마웠다. 한 사람 한사람 얼굴을 마음에 새기며 조용히 지나가는 시간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도 늦은 시간에 파장이 되었다. 갈 사람들은 모두 가고 나도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갔다. 오늘도 비틀거리는 나를 송호와 숙자언니가 바래다주었다. 김과장은 줄곧 불만이 가득찬 얼굴로 앉아 있었고 내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았으나 나는 모르는 척했다. 가로등이 켜져 있는 골목에 들어서고는 나는 토할 것 같아 서있는 전신주를 부둥켜안았다. 그러면서 정신이 조금 아득해 져오는 것 같았다. 숙자언니가 늦었다며 가는 소리가 들렸다. 송호가 자신이 옆에 있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숙자 언니에게 가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입이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집 앞 가로등 밑에 앉아 있었다. 송호는 음료수를 들고 안절부절 못하며 내 앞에 서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송호씨 뒤 우리 집 대문 앞에 김과장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 아직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한 그에게서 섬뜩함을 느꼈다. 그는 그림자처럼 대문에 붙어 있었다. 간사하고 음흉하기까지 한 그를 여지껏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지냈던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송호가 손에든 음료수를 내밀며 나를 바라보았다.

. 근데 너 나한테 무슨 짓 한거 아니지?” 내말에 그는 얼굴을 붉히며

.....절대

하하..그냥 해본 소리야. 옆에 앉아봐 정신 좀 차리고 집에 들어가게.”

나는 눈으로는 김과장을 쳐다보며 송호에게 이야기 했다. 일부러 송호를 우리집 대문이 보이지 않는 자리에 앉혔다.

너 여자 친구 사귀어본 적 있어?” 나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럼. 있지

언제?”

대학교 때. ?” 그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옛날이야기를 들려주 듯 이야기 했다.

그냥 궁금해서. 이야기해줘

하하하..그게 그 사람과 사귄건 5년 정도 됐는데, 두어 번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그랬어

정말?”

.. 나랑 사귀다가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헤어졌다가 일 년 있다 다시 오고. 그렇게 두 번을 했어

두 번을 다 받아 준거야?”

, 열 번이라도 받아 줄 수 있었어.”

대단하다. 그렇게 예뻤나?”

그럼. 아주 예뻤지.”

부럽네..”

근데 결국은 다른 남자한테 시집갔어.”

배신자..”

아냐..그런사람..”

나는 그가 어둠속에서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그는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듯 했다. 나는 설직히 그가 사귀었던 여자가 그렇게 예뻤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옛사랑을 예뻤다고 말하는 그 모습이 참 예뻤다.

근데..너두 예뻐.” 뜬금없는 그의 말이었다.

하하. 너 참 사람 기분 좋게 하는 구나.”

, 친구들이 그렇다고 해

..너도 그런말 할줄 알어?”

그럼.” 이 남자는 술에 취해 새벽이 되면 용감해 지는 모습도 있었다.

그런 자신감, 마음에 들어.”

그때 징 하며 문자가 울렸다. 발신자는 김과장이었다.

[회사 나간다고 다른 사람에게 우리 관계에 대해서 떠벌리고 다니면 가만 안 있을 거야.]

그는 못난 남자였다. 모든 것이 확실해졌다. 송호와 이야기 하는 사이 그는 대문앞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내 인생에서도 이제 사라져 주었으면 싶었다.

나는 송호와 이별을 하고는 집에 들어갔다. 짐들을 모두 고향집에 부쳤기 때문에 집은 휑 하고 찬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왠지 모든 것이 끝난 것같아 홀가분하였다.

다음날 일찍 잠에서 깨었다. 아침 첫차를 타고 고향에 내려가고 싶었다. 나는 가벼운 차림으로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섰다. 정든 집을 나섰을 때 어제 그 가로등 아래 송호가 아직 앉아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너 아직 안갔어?”

그는 내 목소리를 듣고는 화들짝 놀라며 일어섰다. 밤을 샜는지 더 부스스해 보였다.

..이제 가는 구나. 너 가는 거 보려고 기다렸어.”

누가 보면 지극정성인줄 알겠다.”

헤헤그는 뒷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으며 나를 따라 지하철이 있는 곳으로 갔다. 나는 그와 어색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아주 여유로워 보였다. 고속버스 터미널로 향하는 지하철로 들어가서는 나는 그에게 작별인사를 했다. 그는 인사를 하는듯하더니 뒤쪽의 뭔가를 보고는 이내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바라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김과장이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김과장을 등지고 서있다 전철에 올라탔다. 그는 아직 자고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송호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는 졸리는 눈을 비비며 웃었다.

?”

나와 김과장 사이 말이야.”

...그거..잘 모르지만, 대청소할 때 김과장이 너 손을 잡는 게 유리에 비쳤어. 그래서 무슨 사연이 있구나 생각 했을 뿐이야.”

그렇구나. 그럼 어제 김과장이 우리 집 앞에 있는 것도 봤어?” 그는 잠시 망설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 너 들어가고도 모서리에 서있는 걸 보고. 그냥 못가겠더라고.”

그랬구나.”

외모만 보고 그에 대해 판단한 내가 참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외적인 것에 눈이 팔려 김과장의 진짜 모습을 보지 못한 내가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

힘내. 그 사람이 나쁜 거지 너가 잘못한 게 아니잖아.” 송호가 내 뺨에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며 이야기했다. 그렇게 나는 송호의 도움으로 무사히 고향에 갈수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지났다. 나는 오랜만에 배대리님에게 안부 차 전화를 드렸다. 그는 여전했고 일이 힘들다고 나를 부러워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얼마 전에 송호가 김과장과 크게 싸우고 둘 다 회사를 그만 뒀다는 것이다. 그럴 애가 아닌데 이상했다며 이야기 해주었다.

나는 송호에게 전화를 해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전화번호가 없었다. 배대리님에게 얻은 전화번호는 이미 사용중지 되어있었다. 그렇게 또 몇 달이 지나고 나는 집근처의 작은 회사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바쁘지는 않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어서 이것 저것 배워보고 있는 중이었다. 여러 가지 경험도 쌓고 하니 그간 내가 얼마나 세상물정을 모르고 살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29살이 되던 어느 날 낮선 번호로 전화가 한 통 왔다.

나야 송호

..친구, 오랜만이야. 회사 그만 뒀다며?”

하하..그렇게 됐어. 너는 잘지내?”

그럼, 잘지내지? 너는?”

나두 잘지내

우리는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오래된 친구처럼 서로를 반가워했다.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어?”

..그거? 만나서 이야기 하자.”

언제?”

지금.”

? 어딘데?”

..여기가 너의 집 근처인거 같은데. 무슨 고깃집 있고 커피숖도 있고..”

..그래 나 거기 알어..지금 갈게 기다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뛰다시피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여전했다. 까무잡잡하고 까칠한 피부, 작은 키, 우락부락한 팔 다리..모든 게 그대로였지만 어쩐지 정겨웠다.

우리는 반갑게 인사하고 서로에게 눈을 떼지 못하고 웃고만 있었다.

오랜만에 우리는 고깃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셨다.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회사도 그만 두고.”

, 시험 보느라고.”

무슨 시험? 국가고시?”

!!” 그는 연신 웃으며 이야기 했다.

붙었구나?”

!!”

축하해!” 나는 만세라도 부를 듯이 기뻤다.

시험보느라 전화기 꺼놨구나.”

미안그는 옛날처럼 머리를 그적이며 미안해했다.

뭐가 미안해, 당연한거지.”

헤헤, 아직 발령은 안 나고 대기 중이야. 전주에 9급 공무원.” 그는 수줍어 했다.

진심 좋겠다.”

이제 자주 놀러올게.”

우리는 불판의 고기를 뒤집어 가며 한잔 두잔 술을 마셨다.

너 김과장이랑 싸우고 나왔다며? 왜 그랬어?”

잘못한 사람은 그 사람인데 너만 회사 그만두고 불공평하잖아. 그래서..”

나는 싸울 줄 모르는 그가 어떻게 싸웠을지 상상을 해 보았다.

암튼 고맙다. 너 진짜 착한 남자다. 인정.”

아냐, 그런 거. 나도 못됐어

그의 수줍어하는 모습에 나는 다시 한 번 웃음이 났다.

 

그는 정말로 그날 이후로 주말마다 나를 만나러 와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어쩐지 기다려지기도 했다. 몇 주 뒤 그가 고기를 뒤집다 느닷없이

행복하게 해줄게라고 말했다.

그래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한거지?” 그가 살짝 당황하며 말했다.

. 내가 바보냐?”

헤헤헤그는 머리를 그적이며 해밝게 웃었다. 그의 미소는 오늘따라 더 매력적이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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