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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머나먼 과거의 유물

 

그는 머나먼 과거의 유물이었다.

만지면 부서질 듯한 그의 갈라진 피부는 섬세한 유물 복원가가 나서도 원형을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부식이 된 듯하다. 하얗게 샌 머리는 수많은 계절을 이기고 견뎌 비로소 빛을 발하는 은빛 실타래 같았고 구부정한 그의 허리는 자연의 순리와 이치 그 자체를 보여준다.

자신만큼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고 있는 그는 언 듯 보기에도 세월과 시간이 그의 곁을 휘감아 도는 듯했다.

그 노교수에 대한 나의 첫 인상은 이러했다.

 

나는 문예지에 송 교수의 특집기사를 위해 그를 만나는 날 그제야 간략하게 요약된 그의 프로필을 읽어보았다.

"S대 철학과 교수, 독일 하이델베르크대학 석 박사학위, 모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

100여권의 철학서적 출판. 1세대 한국 철학자라..~~굉장하군."

하지만 그 굉장했던 이력을 뒤로 하고 그의 모습은 유적에서 갖 꺼내온 유물과 같았던 것이다.

책으로만 세 개의 면이 꽉 찬 서재에 들어섰을 때 두꺼운 돋보기 너머로 흰 막이 조금 낀 그의 눈동자는 나를 보고 있는지 조차 확인 할 수 없었다.

"안녕하십니까? D출판사 편집부에서 나온 김일 이라고 합니다."

그는 나를 확인했는지 돋보기를 벋고 책상 맞은편의 의자를 손으로 가리켰다.

"출판사에서 전화는 받았습니다."

그는 느리고 떨렸지만 마른 입술 사이로 모든 발음들을 끝까지 뱉어내었다.

건조한 먼지 냄새와 오래된 종이냄새 그리고 사람냄새가 그 방을 꽉 메우고 있었고 아라베스크 무늬의 서재의 카펫은 사람의 흔적을 따라 닳아있었다.

나는 먼저 명암을 건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자 교수는 작지만 굳은 몸을 조금씩 움직여 드디어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래 무엇이 궁금하오?"

그는 낮게 숨을 쉬고는 나에게 먼저 질문을 하였다.

". 이번 창사특집으로 철학에 생애를 바치신 교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쓸려고 합니다연로하신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열정으로 연구를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건강은 어떠십니까? 교수님"

교수는 살짝 웃음을 띠우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내 건강이 궁금해 왔소? 난 보시는 바와 같소. 거추장스러운 이 껍질을 벋기는 중이지"

"아직 연구하시는 데는 지장이 없으십니까?"

"철학은 체험이오, 내가 숨이 붙어있다면 아프든 건강하든 매 순간이 연구가 아니겠소?"

교수는 나의 가벼운 질문에도 철학자답게 허튼 대답을 하지 않았다.

"교수님의 인생에서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

"허허허, ...내 인생에서 철학을 이야기해야 한다면 소크라테스처럼 변명 같은 것을 해야 되겠구먼. .....철학은 내 인생을 깨워 주었다오, 무지한 나를 깨워 무엇을 모르는지 알게 해줬지..... 하지만 아직도 나는 매일 나에게 질문을 한답니다...... 오늘 새롭게 체험한 삶에 대해서 말이지요. 그리고 깨달은 그 해답을 오늘 또 체험하는 것이지요."

한 마디 한 마디 끊어질듯 이어가면서 그는 말의 속도를 조절하였다.

그의 불투명한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나는 그의 눈빛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었다. 깊은 내면을 회상하는 듯한 그의 눈빛은 떨리는 목소리와는 달리 한점 흔들림이 없었다.

"철학은 체험이라는 말씀이신지요?"

"철학은 ....연구와 학습으로만 되는 게 아니라오.... 관계 속에서 몸으로 익혀가는 것이지. 그래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철학이라는 것이오."

마침 오른쪽 창에서 비쳐오는 햇살에 그의 머리 결은 더욱더 은빛으로 빛이 나고, 마치 훌륭한 고고학자의 손길이 닿은 듯 금이 가있던 그의 얼굴은 새롭게 태어나 반짝이는 듯했다.

"내 철학은 내가 나에게 던져왔던 질문들이지요...보편적인 인간의 삶이기도 하면서 개별적인 내 삶이기도 하고."

나는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서서히 반짝이기 시작한 그의 눈빛으로 뭔가 그에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눈치 챘다. 그가 벋어버리고자 하는 껍데기는 떨어내 버리면 그만인 한갓 흙에 지나지 않았다. 잘 정돈된 유물의 진가가 드디어 나타나듯이 서서히 그는 빛을 발했다.

"삶 앞에 솔직해 진다는 것이 또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지요. 선하고 싶지만 선하지 못한 나를 인정한다면 니체가 되는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면 롤스가 되는 것이지요." 

그의 입에서 서서히 쏟아져 나오는 진실한 단어들은 순전한 보석과도 같았다.

그 이후로 나는 그에게 무슨 질문을 했는지 그리고 그가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나는 어떤 신비로운 고대의 보물을 감동적으로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잘 빚어진 도자기 같이, 잘 조각된 조각품같이..오래 될수록 그 가치가 더해지는 건 물건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의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어느덧 그는 피곤한 듯 작게 접어놓은 손수건으로  두 눈의 눈물을 닦았다. 나는 얼른 녹음기를 끄고 그의 기색을 살폈다.

"이제 그만 해야겠소. 이게 바로 삶이라는 것이지. 늙으면 기력이 떨어지고 죽는다는 것. 허허허"

나는 물건을 챙기고 일어섰다. 그도 느릿한 움직임으로 의자의 팔걸이에 의지해 천천히 일어났다.

"시간 내주셔셔 감사합니다. 기사가 나오면 곧바로 우송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았다.

거칠고 딱딱한 손, 세월에 더 단단해 져가는 그 손에는 인간의 축적된 지혜가 농축되어 있음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것은 후세에게 전해지리라...

나는 문을 닫고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보았다.

찬란하게 빛나는 그의 모습은 앙코르 와트 사원보다 더 성스러워 보였다. 찬란한 문화유산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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