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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친구

[친구]

 

-거북이

순자는 고등학교 2학년이 되면서 초등학교 때 한반을 했던 말자와 짝이 되었다. 형제라곤 오빠들뿐이었던 덕에 성격이 괄괄했던 말자와는 한동네 살 때 까지만 해도 단짝처럼 지내다가 순자가 아랫마을로 이사를 가고 학년이 바뀌면서 둘은 멀어졌던 것이었다. 지금은 18살의 과년한 처녀가 다 되었지만 어릴 적 친구를 만나니 둘은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단짝이 되었다.

 

말자는 옛날과 변함이 없었고 여전히 선머슴처럼 왈가닥이었다. 언니와 둘뿐이었던 순자는 그런 말자가 좋았으며 방과 후에 함께 시내를 쏘다니기도 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를 사먹으며 시시한 연예인 이야기를 하면서 깔깔거리고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말자는 성격과는 다르게 하얀 피부, 커다란 눈에 동글동글한 얼굴형과 앵두같이 빨간 입술을 가진 천상 여자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어디를 가든 이목이 집중되었으며 학교 앞에서 말자를 기다리던 남학생들이 한 달에 한 둘은 있을 정도로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말자는 늘 그녀를 기다리는 남학생을 보면 거친 말도 서슴없이 뱉어내곤 하였다. 그러면 긴장하고 있었던 남학생들은 예상치 못한 그녀의 언행에 사색이 되어 달아나곤 하였지만 그녀의 인기는 사그라질 줄 몰랐다.

 

둘은 공부에도 관심이 없었다는 점에서 쿵 짝이 잘 맞았다. 어느 여학생들처럼 졸업하면 결혼할 요량으로 신부수업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취직을 할 생각으로 주산 부기를 공부하지도 않았다. 둘 다 여느 집의 막내들처럼 세상 물정 모르고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했다.

말자의 오빠들은 엄한 아버지로부터 항상 말자를 지켜 줬으며 어머니는 벌써부터 웬만한 집안에서 말자와 혼사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기 때문에 말자에 대해 큰 걱정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순자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돈 버느라 밤낮으로 바쁘셨기 때문에, 그리고 하나 밖에 없는 언니는 물러 터졌기 때문에 무얼 하든 거리낌이 없었다.

 

나른한 여름 오후 둘은 어데 갈 곳도 없고 해서 마을 우물터 느티나무 아래에 교복치마를 걷어 올리고 앉아 있었다. 나무둥치 어디쯤에서 죽을힘을 다해 우는 매미 소리에 둘은 오랜만에 조용히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감상에 젖어 있었다.

말자야 니는 졸업하고 뭐할끼고?”

말자는 반쯤 풀린 눈으로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니는, 니는 뭐할낀데?”

순자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쓱 닦으며 눈을 깜빡였다.

영자는 선생할끼라고 진주사범대학 간다하고, 방실이는 저거 아부지 회사에 취직한다하고. . 나는 우리 언니 맨쿠로 집에 있다가 시집이나 갈란다.”

순자는 딱히 꺼리길 것도 없이 여고 졸업 후 집에서 살림살고 있는 언니를 생각하며 대답했다.

? 시집을 간다고?”

말자는 순자의 대답이 의외라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뭐 그리 놀라는데? 우리엄마가 글카든데 너거 엄마도 니 졸업하믄 시집 보낸다고 여기 저기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더라

그러자 말자는 옷에 벌레라도 묻은 듯이 벌떡 일어나 팔뚝을 문지르며 고함을 질렀다.

미쳤다. 징그럽게 결혼은 무슨 결혼이고. 이 나이에. 나는 고마 싫다. 나는 서울가서 실컷 놀다가 니중에 나중에 시집 갈꺼다. 니도 내캉 같이 놀다가 시집가자 응?”

순자는 말자의 하는 짓이 우스워 깔깔 대다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를 진정 시켰다.

근데 그게 니 맘대로 되겠나?”

순자의 진심어린 충고였다.

 

그렇게 그녀들은 고3이 되었고 여전히 붙어 다녔으며 졸업할 때가 다가오자 말자를 차지하려는 남학생들이 집 앞까지 찾아와 기웃 거리기 시작했다. 혼자 집 앞에서 남학생들과 마주치기 싫었던 말자는 언제부턴가 순자를 집까지 데리고 오게 되었다. 선머슴 같았던 말자도 혼자서는 남학생들을 상대하기 어색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날 오후 늦게까지 말자 집에서 만화책을 보며 놀던 순자는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대문까지 배웅 나오는 말자가 순자 옆을 쓱 지나가는 까까머리 총각에게 알은 체를 하였다.

오빠야. 이제 오나?”

오야~~ 고마 놀고 말자 니도 집에 들어가자?”

알았다. 숙자야 잘 가고 내일보자

말자는 그렇게 말하고 처음 보는 까까머리 총각과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숙자는 그 사람이 군대 가 있다던 말자의 셋째 오빠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어렸을 적에 같이 멱도 감고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때의 철없던 소년이 숙자의 눈에 늠름한 총각이 다 되어 있었다. 그날 밤 숙자는 잠을 못자고 밤새 뒤척였다. 엘비스 프레슬리를 좋아하던 그런 기분과는 다른 감정이 밤새 그녀를 들뜨게 했다.

다음날 그녀는 말자에게 그녀의 오빠에 대해 은근히 물었다.

우리 경식이 오빠야 지난달에 제대했잖아. 그라고 지금 경찰 되려고 공부한다. ”

경찰?”

우리 오빠야 사법시험 준비하다가 군대 갔잖아. 아부지가 빨리 취직하라고 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기다. 학교 댕길 때 공부 잘했는데 안됐지.”

숙자는 경찰이라는 말에 귀가 솔깃해졌다. 군대와 경찰이 힘이 있던 시절이라 그녀는 경찰이라는 말에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그날부터 말자가 가자고 하지 않아도 그녀의 집으로 출퇴근을 하다시피 했다. 그리고 경식과 마주치면 눈인사를 하기도 하고 집에 있던 간식도 챙겨와 몰래 편지와 함께 그의 책상에 올려다 놓으면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기 시작하였다. 경식은 그렇게 숙맥은 아니었다. 처녀태가 나는 숙자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알고부터 경식도 숙자에게 적극적이게 되었다. 말자에게는 비밀로 하고 숙자의 집 앞에 기다렸다 그녀를 만나기도 하고, 주말에는 용돈을 쪼개 영화를 보러가기도 하였다. 숙자가 여동생의 친한 친구라는 것이 조금 걸릴 뿐 갓 제대한 경식도 자신의 젊은 혈기를 주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곧 졸업이 다가오고 말자는 숙자의 예상대로 여러 차례 선을 보았다. 몇 번은 남자의 얼굴을 보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나왔고, 엄마의 매질을 여러 차례 당하고 난 이후는 건성으로 자리에 앉아 있다가 나오곤 하였다. 수십 번의 선을 보고나자 말자는 지쳤는지 부산에 산다는 어떤 남자와 날을 잡게 되었다.

그사이 경식은 경찰 시험에 합격하게 되어 멀리 밀양으로 발령을 받아 가게 되었다. 숙자는 당연히 경식이 자신과 결혼하여 같이 가게 될 줄 알았지만 그것은 그녀만의 생각이었다. 경식은 발령을 받자말자 간다만다 말도 없이 밀양으로 떠나버렸고 그것을 숙자는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그녀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자신의 동네에서, 경식과 데이트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소문이 다 났을 뿐더러, 경식과 자신은 손도 잡고 뽀뽀도 한 애인사이였는데 경식에게 무참히 배신당한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숙자는 말자를 찾아갔다. 숙자는 말자에게 눈물을 짜내며 자초지정을 이야기 했고, 인생이 끝난 것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방구석에 처박혀있던 말자는 재미있는 일을 만났다는 듯이 숙자의 이야기를 들었다.

경식이 이 새끼, 우리 오빠지만 쓰레기네. 나는 그런 줄도 모르고 지난주에 오빠가 경찰서 있는 여경이랑 어데 해인사에 놀러간다 하길래 애인 생겼나하고 좋아했지 뭐고. 숙자야, , 내가 뭐 어떻게 해주꼬? ? 울지 말고 대답해봐라.”

숙자는 말자의 애인 생겼나대목에서 한 번 더 목 놓아 서럽게 울더니 입술을 꼭 깨물고 간신히 숨을 껄떡이며 진정하려 노력하였다. 그녀의 인생에 최대의 위기 같은 이 일을 그녀는 어떻게 해결해야할지 밤새 생각했음에도 친구인 말자에게 쉽게 말을 꺼내놓지 못하였다.

말자야?” 드디어 진정하고 친구의 이름을 숙자가 조용히 불렀다.

? 그래 말해봐라.”

말자는 숙자에게 바짝 다가가 앉으며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너거 오빠야 사는데가 어데고? 내 가서 함 따져 볼란다.”

. 그거 좋지. 내가 같이 가주꾸마. 그 새끼 내손에 죽이삔다.”말자는 막 전쟁을 선포한 장수 같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런 말자의 모습을 보며 숙자는 고마운 반면에 자신의 계획을 생각하며 그녀를 말려야 된다고 생각했다.

말자야, 이거는 우리 문제니까 내가 가서 조용히 처리하께. 고마운데 니까지 그랄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말자는 숙자의 이야기에 잠깐 머리를 굴리더니 이내 생각하기 귀찮다는 듯이 친구의 말에 동의를 해주었다. 그 주 토요일, 숙자는 말자가 적어준 경식의 자취방 주소를 받아 쥐고는 아침일찍 집을 나섰다. 어느새 여름이 가고 가을로 접어든 고속도로를 지나 떨리는 마음으로 숙자는 경식의 방문 앞에 섰다. 경식의 방문 앞에는 경식의 것으로 예상되는 남자의 신발 하나와 여자 구두가 한 켤레 놓여있었다. 그것을 본 숙자는 치마를 더욱 세게 말아 쥐었다.

저기요? 계세요?”

숙자는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경식을 불렀다. 그리고 곧 런닝 바람의 경식이 방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고 그 뒤에 누고?”하는 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 숙자야? 니가 여기 왠일이고?”

경식은 얼굴이 벌개 서있는 숙자를 발견하고 적잖이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오빠야 내 할 말이 좀 있어서 안 왔나. 연락도 안 되고 얼굴도 볼 수 없고......”

경식은 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무슨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다방 레지 같은 여자가 커피포트를 싸들고는 방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숙자야 들어온나.”

숙자는 여자가 나온 방을 한번 쓱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고 경식은 능글맞게 앉아선 숙자 뒤로 조용히 문을 닫았다. 그러고 그 방에선 간간히 울음소리가 들렸고 곧이어 숙자가 나지막히 엄마를 부르는 신음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그러고 밤이 되고 숙자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숙자는 자신의 엄마와 언니가 찾아와 머리끄덩이를 잡고 끌고 갈 때 까지 그곳에서 살림을 살았다. 그러다 일주일도 못 되 찾아온 엄마에게 끌려가서는 죽도록 매를 맞고는 집에 갇혀 지내다가 밤에 몰래 찾아온 말자를 만나 눈물을 짜내곤 하였다.

너네 엄마하고 우리엄마하고 이야기 하는 거 들었다. 니 우짤라고 그랬노?”

말자는 뒷간 문에 기대어 말자를 안쓰럽게 쳐다보았다.

너네 엄마가 뭐라하던데?”

숙자는 초조해 하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뭐 우짜긴 우째. 너네 엄마가 니 임신했다고 책임지라고 하니까...........”

? 그래서

내 결혼하고 날 받기로 안했나.”

숙자의 얼굴에 드디어 화색이 돌았다.

진짜로?”

, 근데 니 진짜 임신했나?”

말자는 숙자의 배를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숙자는 이번 달에 달거리가 끊긴 것을 조용히 이야기 해주었다.

말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집으로 돌아갔다.

 

말자는 말자대로 고민이었다. 결혼은 죽어라 싫은데 다음 주면 낮도 모르는 남자와 혼인을 해야 한다는 것이 끔찍하였던 것이다.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는 이 현실이 답답하기만 했다. 게다가 숙자가 임신이라니. 몸속에서 뭔가가 꼬물댄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돋아왔다. 하지만 날은 지나고 드디어 그녀의 결혼식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부케는 숙자가 받기로 했다. 그래도 요즘은 현대식 결혼식이 유행이라 하여 말자의 부모님은 하나밖에 없는 딸내미 결혼에 온갖 정성을 다 쏟은 것이다. 울 것 같은 신부가 아버지의 손을 붙들고 끌려나오듯 나왔고 건실해 보이는 신랑이 신부의 얼굴을 보며 입이 귀에 찢어질세라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 나왔다.

신랑이 군청에 다닌다잖아. 인물도 훤칠하고 좋네.”

동네 사람들이 숙덕이는 소리를 들으며 숙자는 옆에 앉은 경식의 팔짱을 오지게 끼었다. 경식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탐탁지 않은지 연신 불편해 하는 기색이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모두들 집으로 돌아가고 숙자는 경주로 신혼 여행가는 말자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온 숙자는 말자의 첫날밤을 상상하며 이불을 뒤집어쓰고 웃었다.

그러다 잠이든 숙자는 새벽에 창문을 두드리는 희미한 소리에 깨어 일어났다.

그녀가 창을 열자 창백한 얼굴을 한 말자가 거기 서 있는 것이었다.

. . 여기는 우째왔노? 그리고 왜 왔노? 신랑은 우짜고

숙자는 파자마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말자에게 달려 나갔다. 깊어가는 가을 새벽은 으스스하게 서늘했다.

, 숙자야. 내 서울갈끼다.”

말자는 장난기 없는 얼굴을 하고는 숙자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내는 결혼이랑은 안맞는갑다. 내는 남자가 뱀만큼 징그럽더라.”

이렇게 이야기 하고는 말자는 코를 훌쩍였다.

숙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말자의 손을 잡아 주었다. 새벽어스름이 걷히고 곧 해가 떠오르려는 찰나였다.

그래도 돌아가야지. 이대로 도망 가버리면 앞으로 우째 살라고 그라노.”

숙자는 그래도 꽤나 어른스러운 충고를 생각해내 말자를 다독여 보려고 노력했다.

말자는 진정이 되자 옷을 추스르고 일어섰다.

우리 엄마 아빠가 찾으면 내 못봤다고 그래라 알았재? 내는 혼자서도 씩씩하니까 잘 살끼다.”

말자는 숙자의 손을 뿌리치고는 해가 떠오르는 반대쪽 어둠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다음날 그 일로 동네가 발깍 뒤집혔다. 말자 신랑은 새벽에 말자가 없어진 것을 알고 말자의 집으로 찾아 왔고 말자의 가족들은 여기 저기 말자를 찾으러 정신없이 다녔다. 이때 경식의 역할이 컸다. 경식은 경찰답게 말자가 터미널에 새벽에 왔었다는 것과 서울이 아니라 해운대행 버스표를 끊어 갔다는 터미널 김양의 증언을 듣고 바로 해운대로 향했다.

해운대에서 말자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고 했다. 터미널 앞 해변에 쭈그리고 앉아 생각에 골몰해있는 말자를 가족들은 어렵잖게 붙잡아 집으로 데리고 온 것이었다. 말자는 울고불고 죄송하다고 빌었지만 성난 아버지의 매질을 피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말자와 그들 부모는 신랑의 집에 찾아가 빌었지만 화가 난 산랑과 그의 부모는 말자를 더 이상 받아줄 수 없다고 했다. 동네에는 신혼 첫날밤을 치룬 말자가 소박을 맞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말자는 개의치 않았다. 단지 그들 가족의 시름이 커졌을 뿐이었다. 이 일이 있고 숙자와 말자는 만나지 못하였다.

숙자는 숙자대로 배가 불러오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출입을 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었다.

숙자는 말자의 소식을 언니를 통해 간간히 들을 수 있었다. 말자가 이후에 여러 번 집을 나갔다는 것과 이번에는 말자 아버지가 그녀를 찾지 말라고 호통을 쳤다는 것이다. 숙자는 자신의 결혼이 빠른 시일 안에 치러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숙자는 엄마에게 말하고 경식의 자취방에 가서 살겠다고 이야기 했다. 결혼식은 못해도 혼인 신고라도 해놔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를 더 이상 말리지는 않았다. 그렇게 숙자는 경식의 집에서 배가 부른 채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숙자는 한동안 말자의 소식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한다. 부산에서 보험 장사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고, 남자를 만나서 같이 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었다.

 

그러고는 세월이 흘러흘러 20살의 처녀들은 50중반의 중년 여성이 되었다. 말자는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고 고향에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그 동안 번 돈으로 조그만 시락국 집을 차려 장사를 시작하였다. 숙자는 아이 넷을 다 키우고 돌아온 말자를 도와 같이 시장통에서 시락국 장사를 시작하였다. 그간의 궁금했던 일은 많았지만 둘은 그 동안의 이야기는 많이 나누지 않은 걸로 안다. 다만 고왔던 말자의 얼굴이 축이 난 것과 한 달 걸러 한 두 번씩 숙자가 눈이 퉁퉁 붓거나 멍이 들어 나타나는 사정으로 둘은 그들의 사정을 잠작 할 뿐이었다.

오늘도 아침 일찍 둘은 부엌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깍두기를 담그는 중이었다. 깍두기를 듬성등성 썰어내는 숙자의 눈은 오늘도 빨갛게 충혈 되어 부어있었다.

우리 집 식구 중에 아무도 그런 남자가 없는데 경식이 오빠는 와 그라노 모르겠네.”

말자가 숙자를 흘끗 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계집질 하는 것도 모지라서 마누라한테 손지검까지 하나.”

숙자는 훌쩍하며 코를 닦았다.

됐다. 고만해라. 그런 거 아니다.”

둘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는 절여진 무에 양념을 버무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둘은 조용히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니 팔자보다는 낮지.’

하얗던 깍두기는 거친 두 여자의 손길에 점점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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