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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묻지 않아도 알수 있는 것들(1/7)

 

 

 

 

[ 묻지 않아도 서로 알 수 있게 ]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다. 어제까지 춥고 눈이 오더니 다행이 오늘은 한결 포근해졌다.

나는 집 앞의 커피숍에서 오전부터 앉아 책을 보고 있다. 하지만 집중하지 못하고 30분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어두운 곳에 자리를 잡은 탓에 눈이 아프기도 했고 혹시나 그 사람이 올까 하는 기대감에 조그만한 소리에도 고개를 들게 되는 것이기도 했다.

내가 고개를 들 때마다 매장안의 테이블은 조금씩 채워져 가고 있었다. 모두들 커플인 듯 했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했다. 서로 손을 마주잡고 그윽하게 바라보기도 하고, 커피를 홀짝거리면서 서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은은한 카페의 조명과 감미로운 재즈 선율이 젊은 연인들의 모습을 더 아름답게 해주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들때마다 더 세게 눈을 깜빡였다. 그들의 눈에서 광기처럼 뿜어져 나오는 행복이 나의 눈을 멀게 할것 같아서 였다.

 

반면 읽고 있던 책속에는 몬테크리스토백작의 복수가 절정에 올라 있었다. 핑크가 흩날리는 이 카페에서 복수의 칼을 든 백작을 읽는다는것이 묵은지 같이 숙성된 솔로가 아니라면 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문득 크리스마스날 혼자 카페에 앉아 있는 내가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솔로에겐 지옥이나 마찬가지인 이 곳에 겁도 없이 스스로를 이들 한가운데 던져 둔 것이다. 사실 불쑥 불쑥 자리를 박차고 나가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오늘은 그와 자연스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란 생각이 들어 한번씩 심호흡을 하며 자리를 지키려고 노력중이었다.

 

"실례지만 의자 하나만 쓸 수 있을까요?"

젊은 남자가 내 테이블의 빈 자리중 하나를 바라보았다. 그 사이 이미 실내의 모든 테이블이 차버린 것이고 네 명의 어린 커플들이 작은 테이블에 모두 끼여 앉기 위해 내 의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예 그러시죠"

나는 천사 같은 미소를 보이며 너그러이 허락해주었지만 실은 하나의 의자도 내주고 싶지 않았다이 모든 자리를 오늘 안에 누군가가 와서 채워줬으면 하고 바라고 있기 때문이었다.

'오늘 그 사람은 나타날까?'

 

내가 2년째 살고 있는 오피스텔의 앞집으로 석달전 그 남자가 이사를 왔다. 그 사람은 이사 온 첫 날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도 이사떡을 돌리며 인사를 하였다. 나고 드는 일이 잦은 오피스텔에서는 드문 일이었기에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그 특이한 사람과 나는 자주 마주 칠 일이 별로 없었다. 오랜 자취생의 노하우로 마주치기 불편한 사람의 동태 정도는 금방 파악 할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남자가 나가기 전에 나는 나갈수 있었고 그가 들어간 뒤에 집으로 들어갈 수 있는 노련함이 있었다. 오피스텔에서 낯선 남자와 자주 마주칠 필요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를 특별한 일이 없으면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그런 이웃으로 정의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 남자는 그런 나의 정의에 자꾸만 예외 상황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가령 그가 우리 집 벨을 누르고 분리수거에 대해서 묻는 날이 생기거나(관리실에 물어보면 될것을 왜 나 한테 묻는 것인지), 어떤날은 이불세탁을 잘하는 곳이 어딘지 그런 것들을 물어오기도 하였다. 언젠가 그 집 현관앞에 떨어진 그의 장갑 한짝을 주워들고 초인종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게 만든다든가 그래서 그집 문고리에 장갑을 살짝 올려 두고 들어왔는데 다음날 아침 출근하는 나를 기다렸다 굳이 내가 그랬냐고 고맙다고 그래서 나는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인사를 하게 만드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는 저녁에 대문 앞에 '여러 가지 신세진 것도 있고, 싸게 팔기도해서 샀습니다. -502-' 라고 포스트잇이 붙은 다육이 화분이 놓여있는것을 보면 잊었던 그 남자의 존재에 대해서 또 인식하게 되는 날도 있었다.

 

백작의 복수가 정리되고 있는 중에 나는 책을 덮었다. 그가 복수 중에 느끼는 허무함은 이해 하겠지만 제발 그깟 감정따위로 복수를 그만두지 않길 바랐다. 나는 식은 커피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늦은 공복감을 느꼈다. 식은 커피를 들고 계산대로 가서 502호가 먹었음직한 샌드위치와 우유 한잔을 주문했다. 퇴근후나 주말에 그가 이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는 것을 자주 본 이후로 나는 한동안 이곳에 발길을 끊었었다. 그 동안 알고 지내던 점원은 그만 두었는지 얼굴이 해사한 어린 학생이 주문을 받았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이 위험해 보인다던가 해서 그를 피한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붙임성있게 하면서도 지켜야 할 선은 넘지 않았고, 오히려 다른 층의 사람들과 더 친하게 지내는 듯 해 보였다. 오히려 내가 행여나 그 사람과 가깝운 사이가 되지 않을까 지레 겁을 먹은 것일 수도 있다. 아무런 보증도 없는 사람과 느닷없이 가깝게 지내게 된다는 것은 눈을 가리고 밀림을 지나는 것과 다를바 없는것이라 나는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이 살아가고 있는 서울생활에서 느는것은 나를 지키고 방어하는 기술 뿐이었던 것이다.

지난달 늦게 퇴근해서 집에 오는 중 나는 생각 없이 이 카페의 안을 들여다보았고 그 시간에 그곳에 앉아 있던 그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는 나를 보며 무척이나 반갑게 손을 흔들었지만 나는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서 멍하니 서있다 못 본 척 하며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그는 그때 밀림속을 헤메는 한 마리의 상처 입은 짐승을 보았을 것이다.

 

그날 이후 나는 이런 저런 생각들을 많이 하게 되었다. 나 자신을 지키기만 하고 살았던 지난날동안 내게 남은 것은 결국 나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내게 허락된 공간은 두평 남짓한 이 오피스텔밖에 없다는것도.

오늘 이렇게 그를 기다리는 것은 그가 좋아서도 아니고 심심해서도 아니고 단지 이제 나를 드러내 놓는 것이 조금은 편해졌기 때문이다. 만약 오늘 그가 이자리에 온다면 이웃으로써 한번쯤은 다정하게 인사할수 있을것 같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우유가 눈앞에 나왔다. 빨간 토마토와 노란 치즈 그리고 푸른 양상추가 배열되어있는 샌드위치가 번잡한 생각들을 정리해 넣어주었다.

 

"어 그거 제가 좋아하는 샌드위친데요?"

이제 막 쏟아지기 시작하는 눈을 맞고 카페 안으로 들어온 그가 나의 샌드위치에게 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를 쳐다보았다. 깨끗하지만 오래입어 후줄근한 체육복에 만화책을 옆에 끼고 서 있는 그는 나보다 샌드위치와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기세였다.

"안녕하세요. 집에 계셨나 보네요?" 나는 샌드위치를 대신해서 그에게 안부를 물어주었다.

"..보다시피." 그는 잠깐 자신의 복장을 의식 하는 듯하더니 바로 체념하고 웃어주었다. 그런 그의 눈은 묻지 않아도 '메리 크리스마스'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반대로 그도 나에게서 거리를 두려고 하는 두려움이 아닌 그때와는 다른 편안함을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내가 그를 피하지 않고 똑바로 보려고 고개를 들고 마주 서있기 때문이다. 그 사이 드문드문 빈 테이블이 생겼지만 그는 내가 비워두었던 나의 맞은 자리로 왔다.

"방해가 안된다면 같이 앉아도 될까요?"

나는 그에게 앞자리를 치워 주었다. 그러고는 무심하게 샌드위치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도 말없이 우유를 마셨다. 우리사이에는 오가는 눈빛은 없었지만 창밖에 고요히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평온한 성탄절을 맞은 듯한 느낌을 느꼈다. 묻지 않아도 알수 있는 만큼의 성탄 느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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