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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자두 한 알

자두 한 알

 

 

숲길을 걷는 중이었다. 울창한 숲속이었지만 나무 사이로 터져 들어오는 햇빛에 밝고 화사한 느낌이 나는 그런 곳이었다. 나는 언제 부터인가 맨발이었고 따뜻한 융단 같은 풀잎을 밟으며 여기저기를 헤매는 중이었다. 한참을 길을 따라 걷다가 나는 주먹만 한 빨간 자두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을 보았다. 드디어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우연이었는데 나는 원래부터 이 것을 찾고 있었다는 듯이 무척 반갑고 기뻤다. 가까이 다가간 그 나무는 내 키만 한데다가 굵기도 꼭 내 허리만 했다. 자두나무는 처음이었지만 확실히 이것은 자두 나무였다.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알이 굵은 자두가 이런 인적 없는 곳에서 보석같이 빛나고 있을 줄이야. 나는 보기만 해도 침이 고이는 그 열매에 살며시 손을 갖다 대었다. 태양의 붉은 빛을 발하고 있는 그 자두에서 상큼하고 달달한 냄새가 났다. 탱탱하게 영근 열매 하나를 따서는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내게도 이런 행운이 오다니

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어쩐지 한자리에만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었는데 이 열매를 보는 순간 나는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다 할 좋은 일도 그렇다고 정신없이 힘든 일도 없이 그이와 사는 동안 나는 무엇인가 찾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손에든 잘 익은 자두를 바라보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것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안에서 진분홍의 트로피칼 향이 번졌다. 나는 그 달고 신맛이 입에서 가실 때까지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그리고 감겨진 두 눈에서 눈물 한 방울 흘러내렸다.

 

 묘한 꿈을 꾸고 일어나 아침을 준비하고 남편을 출근 시켰다. 입안에서 자두의 단맛이 느껴져 간밤의 꿈이 계속 신경 쓰였다. 게다가 오늘은 산부인과에 전화를 하는 날이었다이번이 인공수정 3번째 시술이었다. 어떤 감정도 없이 만들어지는 아이라 2번의 실패에도 그렇게 낙담하거나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저 담담할 뿐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신혼과 다름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고 아이가 없어도 될 만큼 충분히 행복했기 때문에 어떻게 되든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서로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고 작은 일에도 감사하며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없어도 우리는 보란 듯이 잘 살잖아. 이렇게 재밌는데 애가 있으면 귀찮지 뭐.

우리는 서로 이렇게 위로하고 남편은 나에게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아이를 생각할 겨를이 없게 열심이었는지도 모른다하지만 날씨가 터무니없게 화창한 날에 공원을 산책할 때면 그 사람과 나는 무언가 찾아 나선 사람처럼 두리번거리며 방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그럴 때면 우리는 서로 말이 없이 한참을 걷는 것이다.

오늘은 피검사를 의뢰하고 임신유무를 확인하는 전화를 기다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어제 그런 꿈을 꾸고 나선 괜히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설거지도 하지 않고 나는 가만히 침대에 누웠다의식을 집중시켜 내 몸에 살아있는 무언가가 있는지 느껴 보았다. 배가 팽팽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 그 자두의 달달함이 입안에 퍼지는 것 같았다. 간밤의 꿈이 태몽이라면 여자 아이일 것이다. 흐르지 않는 강처럼 한자리에서 맴돌기만 했던 우리 집에 그 아이가 물고를 트여 줄 것 같았다.

벌써 2시가 다되어 갔다. 병원에 전화할 시간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시간은 잘도 흘러 가 버렸다.

수화기 너머로 벨소리가 들리고 누군지 알 듯 한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축하합니다. 수치가 조금 낮긴 한데 임신되셨습니다. 내일 병원으로 확인하러 오세요.

나는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는 가만히 배를 만져 보았다. 남들처럼 뜨거운 눈물이 흐르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간절히 바라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꿈속에서 흘린 눈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고마워 자두라고 작은 고마움의 표시는 해 두었다.

어떻게 되었든 나에게 달라 붙어주었으니까. 내가 자두에게 선택된 것이니까 고맙다는 말 정도는 할 줄 아는 엄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였다. 그 사람도 찾아 헤매던 무언가를 찾은 듯이 기뻐하는 것 같았다. 저녁에 남편이 집에 돌아왔을 때 나는 꿈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남편은 내 뺨을 어루만지며 웃기만 하였다. 밤에 자려고 누웠을 때 어떻게 누워야 자두가 편할지 생각하는 내가 우스웠다.

 

다음날 일찍 병원을 찾았다.

 나이 많은 남자의사가 초음파로 여기저기를 찍어 보다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아기집이 안 보이는 데요. 피검사 한 번 더 해보고 확인해 봅시다.

아직 좁쌀 크기만 한 아기가 보일리가 없지 않느냐 다시 봐달라고 이야기 하려다 그만두었다.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나는 피를 한 번 더 뽑고 병원 밖으로 나왔다. 봄에서 여름으로 계절이 가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싱그러웠고 때 묻은 빌딩이며 가로수들에서도 생기가 도는 듯했다. 이런 세상에 함께 살아갈 사람이 하나 더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니 깜빡이는 신호등을 보며 혼자 뛰고 있어도 외롭지 않았다. 괜스레 나는 여기저기를 들렀다 집에 들어왔다. 마트를 몇 군데나 들렀는데 자두를 파는 곳은 없었다. 딱히 먹고 싶었다기 보다 그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남편의 무릎을 베고 누워 티비를 보았다. 우리는 둘이 아니고 셋이었다.

집에는 전화 안했어. 아직 확실치가 않잖아.

평소의 그답게 그럴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오히려 담담하게 대해주는 그의 행동이 더 편하고 좋았다드라마에서처럼 그렇게 기뻐하고 눈물을 짜고 했다면 오히려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좋아할 거 왜 그동안 참아왔냐고. 기만당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연 듯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 둘이 체육복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는 집 앞 슈퍼로 나갔다. 이직은 봄기운이 느껴지는 밤이었다. 착한 아이에겐 꾸벅꾸벅 졸음을 부르는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그리고 그것은 손을 잡고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우리를 배실 배실 웃게 만드는 그런 기분 좋은 바람이었다.

 

수치는 더 높아졌습니다. 근데 아기집이 안 보이신다니 자궁외임신일 가능성이 높아요. 내일 병원에 내원해주세요

나는 수와기 넘어 들리는 소리를 한동안 이해하지 못하였다.

다음날 일찍 찾아간 병원에서 의사는 초음파상엔 역시 아기집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궁외임신이니 더 커지기 전에 약물처리를 하든지 상황이 좋지 않으면 수술까지 해야 한다고 사무적인 어투로 그는 말했다.

정말 다분히 사무적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종종 있다며 컴퓨터를 바라보며 이야기 하였다.

나는 잠깐 병원 복도에 나가 앉아서 크게 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그는 한 시간이 조금 넘어 병원에 와 주었다. 그리고는 간호사의 설명을 듣고는 항암제 비슷한 무슨 주사를 맞고는 집에 돌아왔다. 가슴이 먹먹해 왔다. 자두와 이렇게 헤어지게 된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나는 또 아무렇지 않게 살아갈 수 있을지 생각을 해보았다. 너와 나의 인연이 이것뿐이었다고 말할까, 다 네 탓이라고 말할까 나는 한참을 생각했다.

저녁이 되자 하혈을 하였다. 처음엔 조금이었다가 점점 양이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하필 오늘이 토요일이라 내일은 병원에도 갈수 없는 것 이었다.

나는 오전에 의사가 준 소견서를 찾아 가방에 넣고는 속옷과 지갑을 챙겼다며칠 집을 비울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나와 자두의 마지막 외출이 될 것 같았다우리는 택시를 잡아타고 근처의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나는 이 외출이 즐거웠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두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다. 남편은 어떤 생각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내가 하는 유치한 농담을 잘도 받아 주었다.

나는 택시 안에서 안양천을 따라 노랗게 켜져 있는 가로등을 바라보며 남편과 나만 아는 자두의 존재에 대하여 생각하였다. 존재했다고도 존재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작은 자두가 내 마음속에 얼만큼 오래 남아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나를 선택해준 고마운 자두에게 어떻게 작별을 하고 미안해해야 할지 나는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응급실에는 사람이 붐비었지만 소견서 덕에 나는 복잡한 검사를 하지 않고 수술 절차에 들어갔다. 남편은 침대에 누운 나를 바라보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걱정하지마나는 자두에게도 남편에게도 그렇게 말하였다.

남편은 웃었지만 자두는 어떤 표정일지 알수 없었다.

두 명의 남자 간호사가 침대를 밀고 수술실로 나를 이동시켰다. 나는 빨리 자두에게 무슨 말인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다.

다음에 또 보자는 말도 고맙다는 말도 자두는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았다. 오로지 살아야 하는 목적으로 내게 온 생물이니까.

나는 미안하다는 말이 가장 적합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중에 스르르 잠이 들어 버렸다.

눈을 떴을 땐 차가운 수술실이었고 바쁘게 오가는 간호사에게 내가 한 처음 한마디는 춥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던 간호사가 내 이름을 묻고는 깨어난 것을 확인하고 침대를 병실로 옮겨 주었다. 남편은 수술실 밖에서 6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의사가 지혈이 잘 안 되서 수술이 늦어졌대. 그래도 무사히 끝나서 다행이야.

그러고는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내 옆에 앉아서 가만히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성격이 나는 무척 좋았다. 모르는 척 하지 않으면서 담담하게 바라봐 주는 것. 그의 그런 성격 덕에 우리가 제자리를 맴도는 결혼 생활을 하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시간을 견뎌온 것이다.

참 나 자두 봤어. 수술 후 의사가 스테인레스에 자두를 담아 와 보여줬어. 당신 닮아 이쁘더라.그는 혈관 속으로 기포가 들어가지 않게 호스를 손으로 툭툭 치면서 이야기하였다.

그럴 줄 알았어

나는 이제는 떠나버린 자두에게 더 이상 미안한 감정이 들지 않았다. 끝까지 함께이지 못해도 가족은 가족이니까. 잠깐이었지만 행복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좋았다.

당신이 건강해서 다행이야

남편은 내손을 꼭 잡고 아이 같은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나는 이만큼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자두가 떨어져 나갔을 지라도 이만큼이면 충분히 달달한 인생일 것이다. 잠깐이었지만 우리 모두가 행복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여름을 알리는 빗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모든 것을 쓸어가 버릴 듯 시원하게도 비는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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